조선 상류층 고택, 그 100년의 세월을 걷다

시민기자 박은영

발행일 2019.12.16. 15:20

수정일 2019.12.16. 18:00

조회 5,226

마음이 차분하고 편안해진다. 도심 속에서 만난 한옥의 느낌이다. 바람이 찬 12월의 어느 오후, 버스 7211번을 타고 청덕초교 앞에서 내렸다. 지도를 따라 5분 가량 걸으니 도로 곁으로 가지런한 한옥의 담이 보이기 시작했다. 돌담을 보자 그 따뜻하고 정겨운 느낌에 작게 설렜다.

 성북구 정릉동에 위치한 한규설 가옥 ⓒ박은영

성북구 정릉동에 위치한 한규설 가옥 ⓒ박은영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국민대학교에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7호가 있다. 이는 조선 말엽 한성부를 다스리던 정 2품의 관직인 한성판윤 한규설이 짓고 살던 집이다. 한규설은 어영대장 총융사 한규직의 동생으로 무과에 급제, 포도대장, 의정부찬성을 역임하고 광무 9년에 의정부참점이 되었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시 극구 반대하다 파직되었으며, 한일합방 이후 남작을 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했다.

성북구에 백년 된 고택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차를 타고 지날 때마다 얼핏 봤던 그곳, 지금은 명원민속관으로 불리는 한규설 가옥을 찾았다. 내부로 들어서니 잘 정돈된 누군가의 집을 방문한 것 같았다. 마당은 누군가 비질을 한 모양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장독과 곳곳에 불을 밝히는 등과 네모난 굴뚝, 모든 것은 반듯한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원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은 명원민속관으로 불리는 백년 고택, 한규설 가옥 입구 ⓒ박은영

지금은 명원민속관으로 불리는 한규설 가옥 입구 ⓒ박은영

한옥을 살피며 걷는 내내 은은하게 울리는 소리가 있었으니 처마 끝에 달려 바람이 불면 소리를 내는 ‘풍경 소리’였다. 뒤로 북한산을 끼고 있는 한옥과 그 위로 퍼지는 고즈넉한 풍경 소리는 잔잔한 여운을 남겼다.
안주인이 기거하거나 며느리나 어린 자녀들도 함께 생활한다는 안채는 대문으로부터 먼 북쪽에 자리 잡았고, 안방, 대청 그리고 건넌방으로 이뤄졌으며, 뒤쪽으로 부엌과 찬방이 있는 구조다. 남자 주인의 공간으로 자녀들에게 학문과 교양을 교육했다는 사랑채에는 4개로 분할된 문이 있다.

 백년된 고택 한규설 가옥은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7호다 ⓒ박은영

년된 고택 한규설 가옥은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7호다 ⓒ박은영

그 문을 열면 사방에서 바람 길이 생기고, 마당의 나무와 담장, 안채의 지붕 선을 따라 그럴듯한 풍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시절에도 형편에 따라 집의 구조는 이렇게나 특별했다. 전체는 ㄱ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반에 뒤로 방 1칸이 꺾이어 있다. 사랑방·대청·방과 대청에 툇마루가 있고 유리미닫이가 시설되었다. 개량식 집의 통식이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에 4칸이 부설되며 ㄱ자형집이 되었다.

 집의 구조는 ㄱ자형 평면을 이룬다 ⓒ박은영

집의 구조는 ㄱ자형 평면을 이룬다 ⓒ박은영

3칸 넓이의 안방, 6칸 대청, 2칸의 건넌방이 주요시설이다. 지붕은 팔작과 맞배가 한쪽식 차지했고, 사당은 안채와 곳간채 사이에 있으며 정면 2칸 측면 1칸이다. 별채는 반빗간의 기능에 방이 부설되었고 곳간채는 4칸 규모이다.

이 외 결혼 전 딸들이 기거한다는 별채와 하인이 거주하던 행랑채 등 한규설 가옥은 돌아보면 볼수록 용도가 다른 새로운 공간이 나왔고, 그 규모가 크고 다채로워 자칫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1890년경 지어진 이곳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상류층을 상징하는 저택이었다 ⓒ박은영

1890년경 지어진 한규설 가옥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상류층을 상징하는 저택이었다 ⓒ박은영

1890년경 지어진 이곳은 조선시대 고등재판소 재판장 등을 지낸 한규설 대감의 집으로 전형적인 조선시대 상류층을 상징하는 60칸 저택이었다. 특히 1890년대는 개화사상이 무르익기 시작하던 때로 ‘개량식 한옥’의 기운이 태동되던 시대였다. 따라서 사랑채에 보일러 난방을 하고, 보일러 여열을 이용한 온실을 시설하는 새로운 시대성이 집에 반영되었지만, 이건하면서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을 빼고 이리 넓은 고택을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대문은 주인의 지체를 상징하는 솟을 대문이며, 가마를 타고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규모라 하니, 고택 중 꽤 넓은 곳임에는 틀림이 없다.

 도시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고택을 1980년 국민대학교가 원형 그대로 이건했다 ⓒ박은영

도시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고택을 1980년 국민대학교가 원형 그대로 이건했다 ⓒ박은영

1977년 3월 17일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이 집의 위치는 원래 중구 장교동이었다고 한다. 1980년 도시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국민대학교는 새로 조성된 1,359평의 대지 위에 원형 그대로 고택을 이건한다. 간혹 이렇듯 이건한 문화재를 접할 때가 있는데, 옛 모습 그대로 정교하게 옮겨 지을 수 있는 기술이 참 놀랍고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해질녘의 한옥은 그 분위기가 더 고풍스럽게 보였다. 그간 서울시의 고택을 방문하며 느낀 것은 한옥처럼 예민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집과 그렇지 않은 집의 차이가 뚜렷했다. 오래된 집일수록 꾸준히 보존해야 할 공간이기에 관리와 이용의 균형을 잘 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명원민속관'으로 불리는 이곳은 국민대학교 후문에 자리하고 있다 ⓒ박은영

'명원민속관'으로 불리는 이곳은 국민대학교 후문에 자리하고 있다 ⓒ박은영

국민대로 이건하면 ‘명원민속관’으로 불리는 한규설 가옥은 국민대학교 후문에 자리 잡고 있으며,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방, 주말과 공휴일은 휴관이다. 명원민속관으로 자리 잡은 이곳은 개관이래 안마당을 공연장 삼아 춘계, 추계 정기공연을 중심으로 문화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백 년 전, 방과 마당의 면적이 넓어 가족들의 대소사를 치뤘던 집이 지금은 학생들의 수업이나 여러 행사의 무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대문 입구에 마련된 국민대학교 명원민속관 소개 리플렛 ⓒ박은영

대문 입구에 마련된 국민대학교 명원민속관 소개 리플릿 ⓒ박은영

복잡한 도심 분위기와 상반된 한옥의 정서는 현대인에게 색다른 감성을 선사하는 공간이다. 고택을 일반적으로 낡은 것, 오래된 이미지로 떠올릴 수 있지만, 실제 한옥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제까지 몰랐던 아름다움과 조상들의 슬기로움을 느낄 수 있다. 산자락에 의지해 지으면서도 절대 산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환경을 잘 이용해 살 집을 마련했다는 사실이 말이다.
팍팍한 일상 속, 선조들의 공간이었던 한옥의 색다른 풍경 속을 거닐어 보자. 약 백년 전 이곳에서 실제 밥을 지어 먹고 빨래를 하고 잠을 자기도 했던 그들의 일상을 상상하면 시간 여행을 하듯 잠시 익숙하고 편안한 정서 속에 머물게 될 것이다. 

■ 명원민속관

○장소 : 서울시 성북구 정릉로9길 64

○시간 : 평일 오전 9시~ 오후 5시

○문의 : 02-910-4291 / www.instagram.com/kookmin_myung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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