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주인에 따라 이야기도 한보따리 '백인제 가옥'

정명섭

발행일 2019.10.07. 13:46

수정일 2019.10.10. 10:13

조회 2,081

백인제 가옥 전경

백인제 가옥 전경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57) 백인제 가옥

한옥과 전통으로 가득 한 북촌에서도 백인제 가옥은 단연 눈에 띈다. 1913년에 지어진 이곳은 수백 평에 달하는 공간과 넓은 정원, 한옥 치고는 특이하게 2층으로 되어있다. 아울러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에 대한 많은 사연들이 남겨져있다.

좁은 골목길을 걷다보면 안내소가 있는 탁 트인 공간이 나오고 계단 위에 백인제 가옥의 솟을 대문이 나온다. 계단을 올라가서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붉은색 담장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게 보인다. 낯선 외부인에게 집안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솟을 대문 좌우의 행랑채에는 백인제 가옥의 첫 번째 주인인 한상룡과 두 번째 주인인 최선익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소개되어 있다. 한성은행 총재를 역임했던 친일파 한상룡은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서 북촌 한복판에 거대한 주택을 지었지만 간도 대지진으로 인해 은행 사정이 악화되자 이 저택을 포기해야만 했다. 두 번째 주인인 최선익은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1944년 백인제 박사에게 저택을 넘겨준다. 3.1 만세 운동에 참가해서 의사 면허를 받지 못할 뻔 한 위기를 넘긴 백인제 박사는 조선을 대표하는 의사로 활약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백인제 박사는 동생과 함께 납북당하고 만다. 홀로 남겨진 부인 최경진 여사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이곳을 지켰다. 그녀의 노력 덕분에 백인제 가옥은 다른 북촌의 한옥들처럼 사라지지 않고 남게 되었다. 이후 서울시가 매입하고 수리한 후 일반에 공개되었다. 지어진 시기가 일제 강점기였기 때문에 벽돌을 사용하는 등, 전통적인 한옥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런 모습 역시 중요한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일단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사랑채의 거실에는 고급스런 테이블과 의자, 유성기 같은 근대의 발명품들이 자리 잡고 있다. 개방되어 있지는 않지만 2층은 다다미방이었다는 것으로 봐서는 한상룡이 한옥을 지으면서 서구와 일본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2층으로 된 백인제 가옥 모습(좌), 가옥 내 방공호(우)

2층으로 된 백인제 가옥 모습(좌), 가옥 내 방공호(우)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별채와 마당의 방공호였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별채는 주인이 머리가 아플 때 주변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식혔던 장소고, 마당의 방공호는 태평양 전쟁 후기 일본의 다급함이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개방시간에는 언제든 둘러볼 수 있지만 가급적 미리 예약을 하고 해설사와 함께 내부를 돌아보는 것을 권한다. 더 많은 역사를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이 57번째 이야기를 끝으로 마무리합니다. 지금까지 정명섭 칼럼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손안에 서울'에서는 매주 월요일(발행일 기준) '서울 재발견'이란 제목으로 정명섭 소설가가 서울 구석구석 숨어 있거나, 스쳐 지나치기 쉬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보물 같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정명섭은 왕성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역사를 들여다보며 역사소설과 인문서 등을 쓰고 있으며, <일제의 흔적을 걷다>라는 답사 관련 인문서를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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