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 안팎 600년 이야기 가득 품은 ‘창의문’을 만나다

정명섭

Visit862 Date2019.06.10 14:25

창의문

창의문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40) 창의문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경을 떠나 한성을 새로운 도읍으로 정했다. 그러면서 경복궁을 비롯해서 한성의 성곽과 성문을 쌓는다. 창의문 역시 이때 같이 지어진 것으로 4개의 대문과 함께 지어진 4개의 소문으로 북소문에 해당되는데 북대문인 숙정문과 서대문인 돈의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인근의 지명을 따서 자하문이라고도 불린다.

일곱 후궁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칠궁을 지나 위쪽으로 더 올라가면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고갯길에 도달한다. 차와 버스들이 쉴 새 없이 넘나드는 이곳에는 청운 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서 만든 윤동주 문학관이 있다. 맞은편에는 창의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계단 초입에는 현대사의 비극적인 흔적들이 남아있다. 1969년 1월 21일, 김신조가 포함된 북한군 특수부대 31명이 휴전선을 넘어와 청와대의 코앞인 이곳까지 진출한다. 국군 복장을 한 그들을 수상쩍게 여긴 최규식 경무관이 막아서 돌연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졌다. 1.21사태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최규식 경무관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창의문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과 정종수 경사의 순직비가 나란히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보이는 창의문은 숭례문처럼 웅장한 대신 작고 아기자기한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사람들의 왕래를 위해 만들어지긴 했지만 태종 때 풍수지리상 왕조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문을 닫아버린다. 이 문만 통과하면 바로 경복궁이라는 점도 폐쇄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게 닫힌 문은 중종 때가 되어서야 다시 열린다. 임진왜란 때 한성을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문루가 불타버렸지만 다른 곳은 무너지거나 허물어지지 않았다.

1623년, 왕족인 능양군이 이끄는 반란군이 문루가 없어진 창의문으로 들어와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반정에 성공한다. 역사의 현장이 된 창의문은 영조 때 다시 문루가 세워지게 된다. 왕래가 별로 없는 곳이라 돈의문처럼 사라지거나 숭례문처럼 불타는 비극을 피한 채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었다. 앞쪽에는 창의문의 홍예를 닮은 터널이 하나 더 있다. 홍예의 천정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다른 성문과는 달리 닭이 그려져 있다. 이곳이 지네를 닮은 형상이기 때문에 그걸 제압하기 위해 지네의 천적인 닭을 그려 넣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창의문로 때문에 일부분이 잘려나갔지만 좌우로 성곽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 편이다. 창의문 옆으로는 북악산 탐방로의 시작점인 창의문 안내소가 있어서 오가는 탐방객들과 만날 수 있다. 원래의 역할대로 오가는 사람들의 통로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 셈이다.

‘내 손안에 서울’에서는 매주 월요일(발행일 기준) ‘서울 재발견’이란 제목으로 정명섭 소설가가 서울 구석구석 숨어 있거나, 스쳐 지나치기 쉬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보물 같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정명섭은 왕성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역사를 들여다보며 역사소설과 인문서 등을 쓰고 있으며, <일제의 흔적을 걷다>라는 답사 관련 인문서를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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