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양천향교는 서울에 남아있게 되었을까?

정명섭

발행일 2019.05.20. 13:14

수정일 2019.05.20. 13:14

조회 4,204

홍살문이 보이는 양천향교 전경

홍살문이 보이는 양천향교 전경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7) 양천향교

홍원사를 지나서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걷다보면 홍살문이 보인다. 그리고 홍살문 뒤에는 외삼문과 외삼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이곳에 바로 서울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양천향교다.

향교는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시키기 위한 기관으로서 고려 때부터 설립되었다가 조선이 건국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었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은 향교의 설치와 운영에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향교에게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고, 원활한 운영을 위해 지방관으로 하여금 잘 관리하도록 별도의 지침을 내렸다. 또한 향교에서 공부를 한 유생들에게만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주는 특혜를 베풀었다. 향교는 교육기관 외에도 공자를 비롯한 성인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역할을 했다.

조선의 왕실과 사대부들은 지방에 세운 향교의 교육과 제사를 통해 유학이 지방까지 뿌리를 내리기를 바랬다. 그래서 향교는 지방마다 예외 없이 하나씩 남았다. 하지만 성균관과 학당이 설치된 한양에는 향교가 세워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양천향교는 서울에 남아있게 되었을까? 지방에 있어야 할 향교가 우리 곁에 있게 된 것은 서울의 급격한 확장과 관련이 있다.

서울시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양천향교

서울시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양천향교

양천향교는 태종 11년인 서기 1411년에 세워졌다. 세워질 당시 이곳은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양천군이었다가 나중에 김포와 통합되었다가 광복 후에 다시 서울로 편입되었다.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1980년대 전면적인 보수를 해서 현재의 형태를 갖췄다. 그래서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었지만 양천향교가 아니라 양천향교 터로 되어 있다.

홍살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외삼문의 오른쪽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안에 들어가면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향교에서 머물며 공부를 하는 교생들이 머무는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고, 가운데 계단 위쪽에는 강당인 명륜당이 있다. 현재 동재와 서재는 사무실로 사용 중이다.

명륜당 뒤편에는 내삼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내삼문 안에는 공자를 비롯한 성인들의 위패가 모셔진 대성전이 있지만 제사를 지낼 때를 제외하고 평상시에는 굳게 닫혀있다. 향교는 평지에 세워질 경우 제사공간인 대성전을 앞쪽에 놓은 전묘후학의 형태를 띄웠고, 경사지에 만들어졌을 경우에는 대성전을 뒤쪽의 높은 곳에 두는 전학후묘로 배치한다. 양천향교의 경우에는 궁산의 기슭에 세워졌기 때문에 대성전이 뒤쪽에 있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이룬다. 서울에서 만난 향교는 특별한 존재감을 느끼게 해준다. 향교 그 자체뿐만 아니라 서울의 확장이라는 또 다른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내 손안에 서울'에서는 매주 월요일(발행일 기준) '서울 재발견'이란 제목으로 정명섭 소설가가 서울 구석구석 숨어 있거나, 스쳐 지나치기 쉬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보물 같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정명섭은 왕성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역사를 들여다보며 역사소설과 인문서 등을 쓰고 있으며, <일제의 흔적을 걷다>라는 답사 관련 인문서를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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