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하기에 안성맞춤! 봄날의 종묘 산책

시민기자 박분

Visit1,054 Date2019.03.28 16:00

도심 속에 자리한 종묘, 종묘의 상징인 정전

도심 속에 자리한 종묘, 종묘의 상징인 정전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사당인 종묘는 궁궐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곳이다.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으로 들어서서 이곳저곳 한 바퀴 빙 둘러보다보면 종묘를 비롯해 영녕전, 제례, 신주, 신로 등 일상에서 잘 들어보지 않았던 낱말들과 마주치게 된다. 무겁고 어두운 질감의 낱말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현장을 새봄에 찾아가보면 어떨까? 서울 도심 속에 자리한 종묘에 깊숙이 들어서니 자동차 소리는 간데없고 작은 새들의 지저귐이 반긴다.

종묘에는 박석이 놓인 신로가 길게 이어진다

종묘에는 박석이 놓인 신로가 길게 이어진다

종묘를 걷다보면 세 갈래로 길게 이어진 길을 자주 보게 된다. 박석이 놓인 이 길은 신로(神路)라 불리는데 세 개의 길 중, 가운데 약간 높게 올라와 있는 길이 신향로(神香路)로 혼령과 향·축문이 들어가는 길이다. 신향로 좌우측에 난 길은 각각 어로와 세자로로 왕과 세자가 다니는 길로 구분된다.

신향로를 눈길로 쫓다보면 신주를 모신 종묘 정전과 영녕전까지 이어지고 어로와 세자로를 따라가면 재궁(齋宮)을 거쳐 정전과 영녕전 동문에 닿는다. 신과 사람이 가야할 길을 묵묵히 일러주는 것 같아 내딛는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줄지어 늘어선 20개 기둥과 19칸의 신실은 무려 101m에 이른다

줄지어 늘어선 20개 기둥과 19칸의 신실은 무려 101m에 이른다

종묘의 중심은 제향공간인 정전과 영녕전이다. 종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정전은 언제 보아도 보는 이를 압도할 정도의 장대한 모습이다. 신주를 모실 신실 증축을 하다 보니 무려 101m가 되었다는 종묘 정전, 단일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조 건축물로 손꼽힌다. 문득 어릴 적 100m 달리기 시합이 떠오르면서 악동이 되어 정전 앞에서 한번 달리고 싶어진다.

줄지어 늘어선 20개 기둥과 19칸의 신실에 19분의 왕과 그 왕비들의 신주가 모셔진 정전은 제례를 지낼 때 외에는 문이 닫혀 있어 정전의 내부를 볼 수는 없지만 사실 그 안은 벽 없이 전부 트여 있다. 제향에 사용할 물품을 보관하는 향대청에 가면 신주를 모신 정전의 신실 1칸을 재현해 놓아서 관람할 수 있다.

박석으로 깔린 마당이 엄숙한 느낌을 자아낸다

박석으로 깔린 마당이 엄숙한 느낌을 자아낸다

정전은 조선 태조 4년(1395)에 창건했다. 초기에는 태조의 4대조(목조, 익조, 도조, 환조) 신주를 모신 곳이었으나 점차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정전과 영녕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하며 1608년 다시 지어졌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건물들을 재건한 광해군의 신주는 종묘에 모셔지지 않았다. 폐위되어 왕자신분으로 강등되었기 때문이다.

종묘 정전과 영녕전은 오랜 세월 속에서도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의 궁궐들이 심하게 훼손될 때에도 종묘만큼은 굳건했다. 왕들의 신주를 모신 위엄이 서린 곳이었기에 광폭한 일제도 이곳만큼은 함부로 하지 않은듯하다.

영녕전에는 후일 왕으로 추존되었거나 재위 기간이 짧았던 왕들의 신주를 모셨다. 흐르는 세월 따라 신주도 늘어나 정전에 다 모실 수 없게 되자, 새로 건물을 짓게 된 것이다. 영녕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전보다 규모가 작지만 신실이 모여 장대한 모습을 이루고 있는 있음은 정전과 다를 바 없다. 넓적한 박석들로 채워진 정전의 널따란 마당 또한 엄숙한 느낌을 담아내기에 모자람이 없다.

왕을 보필하던 역대 신하들의 신주를 모신 곳, 공신당

왕을 보필하던 역대 신하들의 신주를 모신 곳, 공신당

종묘에는 왕과 왕비의 신위만 있을까? 정전의 정문(남문)이 보이는 담장을 돌다 내심 놀란다. 종묘는 왕을 보필하던 역대 신하들의 신주도 함께 품었다. 정전 담장 안에 자리한 공신당(功臣堂)이 그곳이다. 종묘 정전이 증축됨에 따라 함께 증축되어 총 16칸으로 83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나라운영에 공이 큰 신하를 선정하여 신주를 봉안해 함께 제(祭)를 지내고 있음이다. 공신당 앞에는 공신들의 이름이 나열돼 있다. 송시열, 이황, 이이 등 잘 알려진 학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살아생전은 물론 세상을 하직해도 군신 간 도리를 다하려는 것 같아 뭉클해진다.

왕과 세자가 머물며 대기하던 장소, 재궁

왕과 세자가 머물며 대기하던 장소, 재궁

종묘에는 정전과 영녕전 등의 제향공간 외에도 궁궐처럼 넓은 부지에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여러 채의 집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다. 왕이 대기하던 곳, 제사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는 곳 등 그 역할도 각기 다르다.

소박한 세 채의 건물로 이뤄진 재궁(齋宮)은 제향을 지내는 왕과 세자가 머물며 대기하던 장소다. 목욕재계를 하고 의복을 정제하던 어재실과 어목욕실, 세자재실로 구성됐다. 어재실에는 왕이 예복을 입고 경건하게 제례를 기다리는 모습이 재현돼 있다. 왕이 종묘에서 타고 다니던 ‘소여’라고 불리는 작은 가마도 어재실 한쪽에 놓여있다. 재궁에서 하룻밤을 지낸 왕과 세자는 재궁 서문으로 나와서 정전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어재실에는 왕이 예복을 입고 경건하게 제례를 기다리는 모습과 작은 가마 ‘소여’가 재현되어 있다

어재실에는 왕이 예복을 입고 경건하게 제례를 기다리는 모습과 작은 가마 ‘소여’가 재현되어 있다

제례에서도 음식은 빠질 수 없다. 정전 동쪽에 위치한 전사청(典祀廳)은 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제사에 필요한 물품들을 보관하던 곳이다. 음식을 준비하는 부엌과 넓은 대청마루 위주로 되어 있어 어느 곳 보다도 무척 분주했을 것 같다. 마당 한쪽에 제사에 사용될 물을 긷는 우물인 제정(祭井)이 보인다. 제례음식을 확인하고 검사했다는 찬막단(饌幕壇)과 제물로 바쳐질 소, 돼지, 양 등의 짐승들을 검사했다는 성생위(省牲位)는 돌로 만들어진 너른 반상 형태다. 남자들이 담당했고 때에 따라 천막을 치기도 하며 무엇보다 위생에 철저했다고 한다.

향대청과 망묘루

향대청과 망묘루

전사청 가까이에 위치한 향대청(香大廳)은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고 제향에 쓰일 향과 축문, 폐백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향대청 건물 끝에는 종묘에서는 유일한 팔작지붕의 건물인 망묘루(望廟樓)가 있어 이채를 띈다. ‘망묘루’라는 이름은 제향시 왕이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다락처럼 높은 누마루 형태로 기다란 구조의 향대청과 연결돼 있다. 선이 고운 건물 앞쪽으로 연못이 내다보이고 뒤쪽으로는 고려 공민왕 신위를 모신 공민왕신당이 자리해 있다.

종묘제례 때 연주를 맡은 악사들이 연습을 하던 건물, 악공청

종묘제례 때 연주를 맡은 악사들이 연습을 하던 건물, 악공청

종묘 제례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춤이 ‘종묘 제례악’이다. 결코 빠트릴 수 없는 것인 만큼 악기를 다루던 악공들은 한데 어울려 음악 연주를 하거나 춤 연습을 했을 터다. 종묘제례 때 연주를 맡은 악사들이 악기를 준비하고 대기하거나 연습하던 건물이 종묘 악공청(樂工廳)이다. 맘껏 악기 소리를 내며 연습에 집중하려는 마음에서일까? 악공청은 정전에서 멀찍이 떨어진 담장 밖 외딴 곳에 자리해 있다.

종묘는 해마다 제례를 지내며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을 널리 알려 잘 보존하고 있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2001년에 세계무형 유산으로 등록되었음을 알리는 안내문을 사방이 트인 악공청 앞에서 흐뭇한 마음으로 읽어본다. 종묘는 그보다 앞선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종묘는 궁궐처럼 화려함은 없지만 숲이 우거져 사색하기엔 안성맞춤이다. 매주 화요일은 휴관하며 토요일과 명절, 문화가 있는 날에는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지만 다른 날은 해설사를 따라서 단체관람을 해야 한다. 해설을 들을 경우 1시간 정도 소요된다. 봄볕을 쬐며 산책하듯 천천히 돌아보려면 자유 관람할 수 있는 주말에 찾아가는 것이 좋다. 종로3가역에서 내려 8번 출구로 나와 조금만 걸으면 종묘에 닿는다.

문의 : 종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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