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망울 톡톡! 서울에서 즐기는 매화꽃 여행

시민기자 이선미

발행일 2019.03.27. 15:57

수정일 2019.03.27. 17:59

조회 5,336

매화는 겨울 끝자락 추위 속에 고결하게 피어났다

매화는 겨울 끝자락 추위 속에 고결하게 피어났다

매화는 추위가 채 물러나지 않은 겨울 끝자락에 피었다. 때로는 갓 피어난 매화에 눈이 내려 이육사 시인도 ‘광야’에서 노래했다. “…지금 눈 내리고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매화는 그 황량한 풍경 속에 시나브로 전해지는 향으로 피었다. 옛 사람들이 매화에 찬탄하고 가까이 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창덕궁 낙선재 앞 백매가 설중매처럼 희고도 곱게 피었다.

창덕궁 낙선재 앞 백매가 설중매처럼 희고도 곱게 피었다.

신흠이 ‘동천년노항장곡(桐千年老恒藏曲)’에서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이라고 읊은 것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아 안락을 구하지 않는 고결함을 닮고자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매(梅)자를 자신의 호에 넣기도 했다. 매죽헌(성삼문)과 매월당(김시습)이 그렇고 매헌 윤봉길 의사도 있었다. 매화에 빠진 옛 사람들은 겨울 끝자락 시간을 내 탐매 여행을 떠나곤 했다.

남산 안중근기념관 앞 홍매. 성장하면 용이 엎드린 형상이 된다고 해서 ‘와룡매’라고 불리는 종이다.

남산 안중근기념관 앞 홍매. 성장하면 용이 엎드린 형상이 된다고 해서 ‘와룡매’라고 불리는 종이다.

남녘에서 들려오는 매화 소식에 마음이 들썩이는 봄날, 옛사람들을 좇아 매화를 찾아보았다.

남산 안중근기념관 앞 홍매는 일본에서 왔다. 일본에서 왔으나 실은 창덕궁에서 뽑혀 일본으로 갔던 나무다. 원래 선정전 앞에 있던 네 그루 매화나무를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출정한 센다이의 다테 마사무네가 전리품으로 뽑아가 미야기현 즈이간지(瑞巖寺)에 두 그루를 심었다.

와룡매는 아직 이르지만 제법 많은 꽃망울이 개화를 기다리고 있다.

와룡매는 아직 이르지만 제법 많은 꽃망울이 개화를 기다리고 있다.

미야기현의 또 다른 절 다이린지(大林寺)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여순감옥 교도관이었던 지바 도시치가 형 집행 직전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라고 쓴 안 의사의 붓글씨를 평생 간직하며 추모하다가 세상을 떠나자 그 아내가 남편의 위패와 안 의사의 친필을 절에 모셨다. 1998년 이 절에서 개최된 안중근 추모법회에 참석한 즈이간지 주지가 옛 매화의 후계목을 보내고 싶다는 뜻을 밝혀 1999년 400년 만에 백매와 홍매 한 그루가 남산에 심어졌다. 아직 가녀린 수형이지만 그 세월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생각하면 수백 년 된 와룡매의 풍모 못지않다.

창덕궁 성정각 자시문 앞 성정매

창덕궁 성정각 자시문 앞 성정매

창덕궁에는 떠나보낸 매화도 있지만 오래전부터 궁을 지키고 있는 매화도 여럿이다. 성정각 자시문 앞에 피어나는 성정매는 애처롭기까지 한 가지에서 곱고도 풍성한 꽃잎을 피워낸다.

원래의 줄기가 고사한 후 곁가지에서 자라나지만 그 꽃잎만큼은 도도하고 당당하다. 가히 세찬 겨울을 이겨낸 힘이 느껴진다. 그에 비하면 맞은편 칠분서와 삼삼와 앞 만첩홍매는 그 꽃그늘 아래 들어도 넉넉할 만큼 품이 넓고 든든하다.

칠분서와 삼삼와 앞 만첩홍매는 곧 몇 겹의 꽃잎으로 만개할 것이다.

칠분서와 삼삼와 앞 만첩홍매는 곧 몇 겹의 꽃잎으로 만개할 것이다.

후원으로 향하는 길목이 만첩홍매의 환희로 물드는 반면에 낙선재 쪽은 사뭇 다른 풍경이다. 소박한 낙선재와 잘 어울리는 백매가 눈송이처럼 고아한 꽃을 곱게도 피우고 있다.

만첩홍매도 그렇고 창경궁 옥천교 매화도 아직은 부푼 망울을 터트리지 않고 있다. 조만간 눈부시게 피어날 매화향에 이끌려 궁으로 산책을 나서는 건 어떨까. 더욱이 창경궁은 밤 9시까지 문을 열고 있으니 매화향 그윽한 궁 나들이로 금세 지나갈 봄날의 눈부신 한때를 만끽해도 좋겠다.

눈송이처럼 소담스레 피어난 낙선재 앞 백매는 봄날 추억 만들기에 썩 좋은 배경이다.

눈송이처럼 소담스레 피어난 낙선재 앞 백매는 봄날 추억 만들기에 썩 좋은 배경이다.

아직 이른 궁의 매화가 아쉽다면 청계천을 찾으면 된다. 신답역 주변으로 가면 흐드러진 매화향이 먼저 반긴다. 이 길에서 사람들은 자꾸 발걸음이 느려진다. 꽃들이 좀처럼 놔주지 않기 때문이다. 곳곳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는 시민들도 여럿이다. 걷다가 쉬다가 모처럼 매화와 함께하는 산책이다.

“이 꽃 이름이 뭐예요?” 지나가던 중년 남성이 물었다. 매화라고 대답하자 곧바로 “아, 사군자?”라며 흠칫 놀란다. 사군자는 알아도 매화는 몰랐던 시민이 함께 걷던 동행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이 꽃이 매화래.” 굳이 거기에 말을 덧붙였다. “숨 깊이 쉬면서 향기도 많이 맡으세요.”

매화길에는 하동의 매화와 담양의 대나무가 함께 자란다.

매화길에는 하동의 매화와 담양의 대나무가 함께 자란다.

꽃이야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때로 향기는 부지불식간에 스칠 수가 있다. 그 향기를 함께 나누고 싶었다. 나무가 서 있는 풍경은 달라졌을지라도 꽃향기는 그대로 아닌가. 청계천의 매화는 지난 2006년 경남 하동군에서 기증했다. 십 년이 흐르니 나무들도 제법 연륜이 느껴진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저승사자와 삼신할매가 만나던 다리에서 내려다본 신답역 매화길

드라마 ‘도깨비’에서 저승사자와 삼신할매가 만나던 다리에서 내려다본 신답역 매화길

이제 매화는 선비들의 고졸한 정취로부터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찾아드는 꽃그늘이 되었다. 매화꽃 그늘이 비장하지 않아도 되는 봄이어서 좋다. 그저 부시게 빛나는 햇살 아래, 또 한 번 눈부신 한때에 취하면 되는 봄. 꽃이 있어 봄날이 좋다. 매화가 피어 이 봄이 더 찬란해지는 서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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