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문화유산 '성균관 석전대제'

시민기자 이선미

발행일 2019.03.14. 15:25

수정일 2019.03.14. 18:33

조회 3,673

팔일무의 문무는 왼손에 약(籥)을 들고, 오른손에 적(翟)을 들고 춘다

팔일무의 문무는 왼손에 약(籥)을 들고, 오른손에 적(翟)을 들고 춘다

3월 11일 오전 10시, 평소에는 고요하던 명륜동 성균관이 들썩였다. 긴 수염에 의관을 정제한 유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단아한 한복을 입은 여성들이 행사를 위해 분주했다. 고구려와 고려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태학과 국자감의 후신으로, 조선 건국 후 태조 7년(1398)에 지금의 자리로 옮긴 성균관에서 공자 탄생 2570년 ‘석전대제’가 봉행되었다.

3월 11일 성균관 춘기석전이 봉행되었다. 우리 조상들이 충과 효를 되새기던 석전대제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이어져왔다.

3월 11일 성균관 석전대전이 봉행되었다. 우리 조상들이 충과 효를 되새기던 석전대제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이어져왔다.

‘석전’은 매년 봄과 가을에 성균관과 전국 234개 향교에서 지내는 유교 고유의 종교의식으로 유교의 성인과 현인들을 추모하고 그 덕을 기리며 가르침을 되새기는 행사다. 예로부터 국가가 주관하던 이 의식을 통해 우리 조상들은 충과 효를 되새겼다.

현재 성균관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그 제자들과 설총과 최치원, 이황과 이이를 포함한 우리나라 유학자 18위 등 39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석전은 일제강점기를 지나오면서도 훼손되지 않고 오늘에 이어진 우리의 전통문화다. 공자의 나라이자 유학의 본산인 중국에서조차 문화혁명 등을 겪으며 원형을 잃어버려 우리나라 석전대제의 가치는 더욱 소중해졌다.

참석자들이 의식에 따라 절을 올리고 있다. 장엄한 의식 속에 음악과 춤이 함께하는 석전대제는 1986년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참석자들이 의식에 따라 절을 올리고 있다. 장엄한 의식 속에 음악과 춤이 함께하는 석전대제는 1986년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다섯 명의 헌관을 포함한 27명의 집사와 문묘제례악을 연주하는 악사 41명, 팔일무를 추는 64명 등 모두 137명이라는 대규모 인원이 참여하는 석전대제는 경건한 의식에 음악과 춤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이기도 하다.

중국과 일본에도 남아 있지 않은 옛 악기 등을 사용하는 문묘제례악과 팔일무, 제관들의 의상과 장중한 의식 절차의 가치 등을 인정받아 1986년에는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예전에는 왕이 수행하던 성균관 초헌관 역할을 올해는 임채정 전 국회의장이 맡았다.(좌) 망료례(우)

예전에는 왕이 수행하던 성균관 초헌관 역할을 올해는 임채정 전 국회의장이 맡았다.(좌) 망료례(우)

김영근 성균관장은 인사말에서 “성현의 말씀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물질만능과 이기주의가 만연한 지금 진정 지키고 가꿔야 할 가치를 생각해볼 때라고 지적했다.

초헌관이 분향하고 폐백을 올리는 전폐례로 시작되는 의식은 초헌례에 이어 아헌례, 종헌례, 분헌례로 진행되고 음복례를 거쳐 폐백과 축문을 불사르고 땅에 묻는 ‘망료례’로 완료된다.

초헌례가 끝나면 무무를 추는데 왼손에 방패인 간(干)을 들고, 오른손에는 도끼인 척(戚)을 들고 춘다.

초헌례가 끝나면 무무를 추는데 왼손에 방패인 간(干)을 들고, 오른손에는 도끼인 척(戚)을 들고 춘다.

헌작이 진행되는 동안 음악과 춤이 이어지는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붉은색 의상을 입고 가로 세로 각각 8줄씩 열을 지어 추는 팔일무다.

올해는 국립국악고등학교 학생들이 영신, 전폐, 초헌에서는 문무(文舞)를, 아헌과 종헌에는 무무(武舞)를 추었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에 유림 독립항쟁 파리장서 100주년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에 유림 독립항쟁 파리장서 100주년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한편, 제100주년 3.1절을 맞아 성균관은 다음달 16일 ‘유림 독립항쟁 파리장서 10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에 유림은 없었다. 김창숙이 독립선언서를 읽으며 통탄하였다. “우리 조선은 유교의 나라이다. 진실로 나라가 망한 원인을 궁구한다면 바로 이 유교가 먼저 망하자 나라도 따라 망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광복운동을 인도하는 데에 소위 유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

김창숙은 즉각 독립청원을 위한 장문을 작성하여 137명의 유림 대표 연서를 받아 파리강화회의에 보냈고 이 일로 유림 500여 명이 옥고를 치르는 등 탄압을 받았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유림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석전 봉행 후 제관들이 명륜당에서 인사를 올리고 있다

석전 봉행 후 제관들이 명륜당에서 인사를 올리고 있다

한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 배어있는 인습들을 바라보며 그것이 마치 유교의 산물인양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선현들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었겠는가. “성인의 글을 읽고도 그가 시대를 구하려 한 뜻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거짓 선비다.” 라고 한 김창숙의 뼈아픈 말처럼 그 가르침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한 탓이 아닌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 했다. 성균관 주변의 회화나무 잎들이 담녹색 기운으로 피어나는 봄날, 옛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에도 참 좋은 시간이었다.

문의 : 성균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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