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들...3·1운동 기념 전시

시민기자 김창일

발행일 2019.03.07. 17:51

수정일 2019.03.08. 18:10

조회 1,288

3·1만세운동 당시 숭실중학교 교정에 게양됐던 태극기

3·1만세운동 당시 숭실중학교 교정에 게양됐던 태극기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독립선언문의 낭독과 3·1만세시위는 전국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촉발시켰다. 3·1운동 후 4월 상하이에서는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상하이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올해는 다양한 기념사업이 열리고 있는데, 서울시 시민청에서 전시하고 있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전시,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와 <3월의 그 날, 서울학생! 뜨거운 함성이 되다>을 소개할까 한다.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3/31)

시민청 시티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

시민청 시티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

1888년부터 1945년까지 200여명의 캐나다인이 선교사, 학자, 의사, 기자로 우리나라를 찾았다. 프랭크 스코필드, 로버트 그리어슨, 아치발드 바커, 스탠리 마틴, 프레드릭 맥켄지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도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훈을 받았다.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 전시는 다섯 명의 캐나다인을 통해 독립운동을 재조명하고 있다.

로버트 그리어슨은 캐나다 의료선교사로 1898년 우리나라에 들어와 함경북도 성진에 정착했다. 3·1운동 시 일제에 의해 탄압으로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부상자를 일일이 치료했다.

맥켄지가 촬영한 의병사진, 사진9_드라마에서도 이를 재연했었다.

맥켄지가 촬영한 의병사진, 사진9_드라마에서도 이를 재연했었다.

프레드릭 맥켄지는 종군기자로 1904년~1905년, 1906년~1907년 두 차례 우리나라를 찾았다. 1907년 고종황제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일어난 의병을 취재하는 중, 일제의 학살과 방화를 목격한다.

양평에서는 의병을 직접 만나 의병의 사진을 기록으로 남긴다. ‘The Tragedy of Korea(1908), Korea’s Fight for Freedom(1920)’을 발간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알렸으며, 1920년 10월 영국에서 한국친우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3·1운동을 알린 프랭크 스코필드

3·1운동을 알린 프랭크 스코필드

프랭크 스코필드는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우리나라에 왔다. 1919년 3·1운동을 사진에 담아 세계에 알려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렸고, 화성 제암리와 수촌리 마을 학살 현장을 방문한 후 보고서를 적성해 일제의 만행을 해외에 폭로했다. 1920년 일제에 의해 추방당했지만, 1958년 다시 돌아와 3·1운동 정신을 강조하며 당시의 독재정부를 비판했고 한국의 부정부패와 싸웠다.

3월의 그 날, 서울학생! 뜨거운 함성이 되다(~3/8)

‘3월의 그 날, 서울학생! 뜨거운 함성이 되다’는 3·1운동을 거족적 항일독립운동투쟁으로 발전시킨 주역은 학생들이었는데, 큰 역할을 했음에도 알려지지 않은 서울 학생·교사들과 그들의 활동, 역사의 현장이 되었던 학교 등을 만날 수 있도록 기획됐다.

학생들의 학적부, 졸업증서, 교복 등을 살펴볼 수 있다. 학적부에는 3·1운동으로 퇴학당한 학생들의 이름도 적혀있다

학생들의 학적부, 졸업증서, 교복 등을 살펴볼 수 있다. 학적부에는 3·1운동으로 퇴학당한 학생들의 이름도 적혀있다

3·1운동 과정에서 만세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역할을 한 것은 학생들이었다. 종교계가 독립운동 논의를 본격화할 무렵 서울의 학생들도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독립선언을 발표할 때 학생들은 시위행진을 확산할 것을 요청받았고, 전문학교 학생보다 더 많은 중등생이 3·1운동에 참가했다.

학생들은 투사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하게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중등생들은 그렇게 3·1운동의 현장에 서게 됐다.

3·1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당시의 나이를 보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학생들이 많았다. 지금으로 치면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다. 어린 나이의 학생들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모진 고문과 형무소 생활을 해야 했다. 만기 출소한 학생도 있었지만, 유관순 열사는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고문으로 옥사하고 만다.

3·1운동기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학생 중 유관순 열사의 이름이 있다(좌) 역사적 현장이 된 학교를 영상으로 볼 수 있다(우)

3·1운동기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학생 중 유관순 열사의 이름이 있다(좌) 역사적 현장이 된 학교를 영상으로 볼 수 있다(우)

학생들의 독립운동에 선생님들도 함께 했다. 이화학당 신마실라 선생님은 3·1운동 전 황에스터 선생님과 이화학당 비밀조직 ‘이문회’를 만들었고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자금 모금활동을 했다.

정신여학교 김마리아 선생님은 일본에서 2·8 독립선언서를 감추고 국내로 진입해 정신여학교 학생들과 만세 시위를 이끌었고, 배재학당 이중화·김성호 선생님은 3·1운동 때 배포할 목적으로 조선독립을 선포하는 내용의 전단과 선포문을 작성·배포했다.

또한 학교는 3·1운동 계획부터 실행까지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배재학당 기숙사는 민족대표들이 체포된 가운데 학생들이 주도하여 3월 5일 제2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한 장소이다. ‘3·1 독립선언서’와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을 인쇄했던 곳은 보성고등보통학교 내 인쇄소 보성사였으며, 정신여학교 김마리아 선생님이 주도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수색 시 3·1운동 비밀문서와 태극기 등을 숨겼던 곳도 정신여학교 회화나무였다.

이후 1919년 3월 5일 일어난 제2차 독립만세시위는 학생으로만 구성된 지도부가 주도한 시위다. 학생들의 독립만세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1920년 3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학생, 학교에 있던 학생들도 다시 독립만세를 부르짖었으며, 동맹휴교, 등교거부 등으로 꾸준히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는 수요시위가 열리고 있다. 해방은 됐지만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있다.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고 했다. 실리를 추구하는 외교를 펼쳐야겠지만, 민족의 자긍심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계속돼야한다. 시민청에서 열리는 두 전시와 함께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역사를 다시금 확인해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

○전시기간 : 2월 23일~3월 31일

○전시장소 : 시민청 시티갤러리

○관람시간 : 3월 09:00~21:00

■ 3월의 그 날, 서울학생! 뜨거운 함성이 되다

○전시기간 : 2월 27일~3월 8일

○전시장소 : 시민청 갤러리

○관란시간 : 09:0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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