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되지 못한 왕자 '양녕대군'은 실패자일까?

정명섭

발행일 2019.02.25. 14:52

수정일 2019.02.25. 14:52

조회 1,636

동작구 상도동 지덕사와 함께 위치한 양녕대군 이제 묘역

동작구 상도동 지덕사와 함께 위치한 양녕대군 이제 묘역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26) 양녕대군 이제 묘역

양녕로라는 이름이 붙여진 국사봉 아래 도로가에는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褆)의 묘역이 있다. 조선 초기의 역사를 다루는 책과 드라마에서 단골 조연으로 나오는 양녕 대군의 실제 무덤이 있는 곳이다.

그의 앞길은 찬란했다. 할아버지가 조선을 세웠고, 아버지가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해서 왕권을 강화시켰다. 심지어 그의 외삼촌들도 싹 죽여 버렸다. 하지만 그는 고분고분하게 기다리지 못했다. 왕세자의 자리는 너무 갑갑했지만 궁궐 밖 세상은 너무나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궁궐 밖으로 탈출해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던 그는 결국 아버지의 눈 밖에 나게 되면서 왕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조선시대 왕족들의 운명을 떠올려보면 살아있는 폐 세자는 걸어 다니는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운이 좋았다. 그를 대신해서 왕위에 오른 동생이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이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형을 처벌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빗발치는 상소를 외면했다. 덕분에 오랫동안 별 탈 없이 살다가 세상을 떠난 그는 국사봉 아래 묻혔다. 숙종 때 뒤늦게 그를 기리는 지덕사라는 사당이 세워졌는데 1912년, 이곳으로 옮겨진다. 그 이후, 오랫동안 굳게 닫혀있던 이곳의 문은 2018년 4월, 드디어 열리게 된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작지만 잘 조성된 정원이 나온다. 야트막한 언덕으로 되어 있는 곳 오른쪽에 1912년 이전한 지덕사가 보인다. 그 옆으로는 비단잉어가 사는 작은 연못과 그곳을 가로지르는 돌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서 언덕을 오르면 사당 뒤편에 그의 무덤이 보인다. 무덤 양 옆으로는 문인석이 두 개씩 서 있고, 상석과 장명등이 놓였다. 그는 죽기 전에 무덤을 호화롭게 치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마 조용히 잊어지길 원했던 것 같다. 하지만 후손들이 무덤에 석물을 쓰면서 왕족의 무덤으로 남게 된다.

양녕대군이 직접 쓴 숭례문 현판 글씨

양녕대군이 직접 쓴 숭례문 현판 글씨

무덤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숭례문’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비석 같은 것과 마주쳤다. 그가 쓴 숭례문의 현판 글씨를 새긴 것이다. 덕분에 숭례문 화재 때 훼손된 현판의 글씨를 복원하는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고 한다. 역사는 그를 양녕대군이라고 부르면서 실패자, 혹은 미치광이라고 덧붙인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패배의 쓰라림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작고 고즈넉한 양녕대군 이제의 묘역에서는 성공과 실패 모두를 감싸 안은 역사와 만났을 뿐이다.

'내 손안에 서울'에서는 매주 월요일(발행일 기준) '서울 재발견'이란 제목으로 정명섭 소설가가 서울 구석구석 숨어 있거나, 스쳐 지나치기 쉬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보물 같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정명섭은 왕성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역사를 들여다보며 역사소설과 인문서 등을 쓰고 있으며, <일제의 흔적을 걷다>라는 답사 관련 인문서를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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