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람기④] 언제부터 성수동은 구두거리가 됐을까?

시민기자 박미선

발행일 2018.11.19. 15:43

수정일 2018.11.19. 17:29

조회 2,872

성수 수제화 전시관인 ‘희망플랫폼’에 전시된 대통령을 위한 수제화

성수 수제화 전시관인 ‘희망플랫폼’에 전시된 대통령을 위한 수제화

패션의 완성은 구두라죠! 멋지게 차려 입은 수트며 드레스를 더욱 돋보이게 해줄 뿐만 아니라 발까지 편안한 구두를 찾고 있다면 ‘성수 수제화 거리’를 방문해 보세요. 장인의 수십년 세월이 담긴 수제화에선 대량으로 만든 공장 기성품에선 느낄 수 없는 품격과 개성이 느껴집니다. 시민기자단이 전하는 6편의 ‘성수 수제화 거리’ 이야기 중 네번째 시간, 성수 수제화 거리가 생기게 된 배경에 대해 알아봅니다.

구두는 대표적인 개화문물이다. 1880년대 개화파 인물들과 외교관들에 의해 처음으로 조선에 소개된 구두는 1920년대 들어서 모던 걸, 모던 보이들의 필수품이 되었다. 특히 신여성에겐 패션아이템이자 자존심이었다. 그렇게 구두는 멋스럽게 그 역사를 시작했다.

모던 걸, 모던 보이들에게 인기 있었던 구두는 당연히 수제화였다.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구두를 만들어야 했기에 당시 구두는 당연히 고가품일 수밖에 없었다. 구두에 적합한 가죽을 만들기 위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만큼 고약한 냄새를 뿜어내는 화학약품과 씨름해야 했고, 그렇게 연마된 가죽을 빛깔 좋게 다듬어야했다. 너무 뻣뻣해도, 너무 말랑거려도 안 되었다. 구두 밑창은 세상 어디를 딛어도 망가지지 않을 만큼 탄탄해야 했고, 그 밑창과 본체를 잇는 바느질은 꼼꼼해야만 비나 눈이 스며들지 않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제화가 어느 날 대량 생산 물결을 타고 온 기성화에 밀려 잊혀지는 듯했다. 하지만 과거는 새 옷을 입고 오늘을 걸어가듯 수제화도 다시 빛을 받기 시작했다.

1930년대 구두 신은 모던 것, 모던 보이. 출처 : 잡지 ‘별건곤’ 1927년 2월호

1930년대 구두 신은 모던 것, 모던 보이. 출처 : 잡지 ‘별건곤’ 1927년 2월호

요즘 사람들은 수제화하면 성수동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대통령과 영부인의 신발부터 인기 셀럽들의 신발까지 다양한 신발이 만들어지는 곳이고, 지난 시간을 멋스럽게 살린 도시재생 현장이기에 성수동은 인기가 있다.

이제는 ‘성수 수제화 거리’로 더 유명한 성수동, 그런데 언제부터 성수동은 구두거리가 되었을까?

사실 최초의 수제화거리는 ‘염천교’ 인근이다. 1925년 완공된 서울역 화물 보관 창고를 중심으로 구두 가죽이 밀거래되면서 그 가죽을 활용하는 구두 수선점들이 40여 개 남짓 생겨났다. 해방을 거쳐 6.25전쟁 직후에는 미군 중고 전투화를 구두로 수선해 판매하며 서울 염천교 일대에 우리나라 최초의 수제화 거리가 형성된 것이다.

성수 수제화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유명인들의 싸인

성수 수제화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유명인들의 싸인

1970~80년대는 ‘싸롱화 전성시대’였다. 당시 한국의 최신 유행을 선도하던 명동을 중심으로 싸롱화가 유행하면서 명동 제화점들은 연 매출 100억을 육박하는 황금기를 맞았다. 1980년대 공무원 월급이 35만원 하던 시절, 상급 기술자의 월 평균 수입이 120만원이었다고 하니 싸롱화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 심지어 싸롱화를 할인 판매할 때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경찰까지 나와 질서 유지 단속을 했어야 했다고 한다.

1990년대 말, 온 나라를 우울하게 만든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싸롱화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매출이 줄어드니 수제화 상점들은 지출을 줄이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렇다고 질 낮은 가죽으로 대충 구두를 만들어 판매할 수는 없으니 당연히 도심에서 변두리로 터전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성수역사 안에는 성수 수제화 거리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있다

성수역사 안에는 성수 수제화 거리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있다

땅값이 저렴하고 구두 생산과 관련된 물품이나 인력 수급이 용이한 곳이 바로 성수동이었다. 당시 성수동에는 금강제화 본사가 있었고, 성남에 있는 에스콰이어, 엘칸토 생산공장과 거리가 가까웠던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그러다보니 영등포, 만리동 등 서울 다른 지역의 구두 공장들도 점차 성수동으로 터전을 옮기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성장해온 성수동도 한 때는 침체기를 맞았지만 현재 성수동은 국내 제화산업의 최대 집적지로 서울 제화업체의 60%, 300여 개가 밀집해 있고, 부자재 및 구두 장식업체도 600여 개가 자리하면서 국내 수제화 시장을 이끌고 있다.

옛 공장 및 창고였던 공간을 리노베이션한 성수동의 한 카페

옛 공장 및 창고였던 공간을 리노베이션한 성수동의 한 카페

한편, 성수동은 2010년부터 도시재생을 통한 문화예술공간으로 새롭게 변신하고 있다. ‘도시재생’이란 낙후된 도시를 허물고 다시 짓는 것이 아닌, 기존의 건물과 거리를 유지한 채 특색에 맞게 활성화하는 사업이다. 대표적 건물로 '대림창고’가 있다. 버려진 창고와 공장이 카페와 갤러리 등으로 재탄생하면서 독특한 외관과 실내 분위기는 사람들의 발길을 모은다. 수제화거리도 서울시 도시재생사업을 만나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2013년 서울시는 ‘성수동 수제화 산업 활성화 프로젝트’의 하나로 수제화 공동매장 ‘fromSS’을 오픈하고, 성수역을 ‘구두테마역’으로 지정했다. 2017년에는 성수동 수제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체험형 쇼룸인 ‘성수 수제화 희망플랫폼’을 개관했다. ‘희망플랫폼’에선 수제화 장인을 육성하고, 판로를 넓히기 위한 공간으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수제화 전시장과 체험공방, 스타와의 콜라보레이션 홍보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골목골목마다 예스런 수제화 매장과 공장, 부자재 상가 등을 마주하는 매력이 있다

골목골목마다 예스런 수제화 매장과 공장, 부자재 상가 등을 마주하는 매력이 있다

성수동은 수제화 공장과 매장, 부자재 상가와 함께 공방, 카페 등이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이다. 쇼핑과 더불어 다양한 문화를 즐길 수 있고, 다양한 건물외관과 조형물, 공원 등 볼거리가 풍부해 걷기도 좋다. 공원과 거리에서는 크고 작은 이벤트들이 수시로 열린다.

지난 10월 20일부터 21일까지 양일간 성수동 일대에선 ‘도시재생 축제, 꽃길만 걸어요’ 행사가 열렸다. 서울숲과 언더스탠드 애비뉴 일대에서 200여 개 프리마켓과 장터, 다양한 체험 행사들이 열려 도시재생의 의미를 참여자 모두와 공유했다.

성수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수제화 매장 및 부자재 거리 등을 안내하고 있는 지도

성수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수제화 매장 및 부자재 거리 등을 안내하고 있는 지도

성수동 수제화 거리는 지하철 2호선 성수역과 뚝섬역이 가까우며, 지역적 특성상 서울숲공원이나 뚝섬한강공원, 건대앞거리와도 가까운 편이다. 구두 쇼핑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공간을 누리며 데이트 코스로, 가족 나들이 코스로도 적극 추천해 주고 싶다.

■ 성수 수제화 거리
○위치 : 성수역에서 뚝섬역까지 이어지는 거리 인근 500 m 내 수제화 제작, 판매업체, 부자재 취급 업체들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

○교통 : 지하철 2호선 성수역 1,2번 출구

○희망플랫폼 이용안내 : 1층 전시장, 2층 체험공방 / 오전 10시~ 오후 7시 운영(일요일 및 공휴일 휴무)

○홈페이지 : http://seongsushoe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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