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조차 천천히 흐르는 '서순라길'을 아시나요?

정명섭

발행일 2018.09.03. 15:23

수정일 2018.09.03. 17:23

조회 3,371

종묘 가을 풍경

종묘 가을 풍경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3) 서순라길

이 길을 바라보면 스팅이 부른 영화 레옹의 주제가인 ‘Shape of my heart’가 떠오른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기타리스트 도미닉 밀러의 기타 연주가 일품인 이 노래는 인생을 카드에 비유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음악과 이번에 소개할 ‘서순라길’, 개인적으로는 종묘 옆길이라고 부르는 골목길은 많은 부분이 닮아있다. ‘Shape of my heart’가 인생을 얘기한 것처럼 서순라길은 우리의 지나간 역사를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순라길 위치도

서순라길 위치도

서순라길은 창덕궁의 남쪽 종묘 옆에 난 골목길로 권농동과 봉익동을 끼고 있다. 이 길은 종묘 덕분에 탄생했다. 서순라길로 불리는 이유도 종묘의 서쪽길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가 만들어지고 바로 세워진 종묘는 죽은 임금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이다. 따라서 사직단과 더불어 신성불가침의 공간이자 국가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500년의 시간 동안 역사를 품고 지내오던 종묘는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훼손된다. 대표적인 것이 북부횡단도로를 개통한다는 이유로 종묘와 창경궁을 절단해버린 것이다. 현재 율곡로라고 불리는 이 길은 지하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런 역사 덕분에 서순라길이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것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서순라길이 정비된 것은 1995년이었다. 생각해보면 신성한 종묘의 담장을 따라 길을 만든다는 것도 조선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종묘 앞 공원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려는 노인들과 저렴한 가격에 술과 안주를 파는 선술집과 이발소, 귀금속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서순라길로 접어드는 순간 믿을 수 없는 고요함이 찾아온다. 천만 인구를 자랑하는 서울은 어느 곳이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된 간판 덕분에 외국에서는 블레이드 러너 같은 영화 속에서 구현되던 사이버 펑크 같은 이미지로 묘사되기도 한다.

어디나 사람과 차들로 가득 할 것 같은 서울 한복판에 있는 서순라길은 비움을 위한 공간처럼 보인다. 차는 물론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고, 시간조차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늘 이곳에 오면 마음이 느긋해지고 편안해진다. 일방통행이라 차들이 왕래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골목길 한쪽은 종묘의 담장이 차지하고 있고, 맞은편은 오래된 상점들이 있다. 이곳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상패를 제작하는 곳과 필름사진 재료를 파는 곳들이 남아있다. 그만큼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을 걸으면 자신의 발걸음 소리가 돌담에 부딪쳐서 메아리쳐지는 소리와 종묘 안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 둘 다 소음으로 가득한 서울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희귀한 소리다. 종로와 창덕궁이라는 번화가 사이에 이런 고즈넉한 길이 있다는 사실은 가끔 나만 알고 있는 비밀로 남겨두고 싶다.

내 손안에 서울’에서는 매주 월요일(발행일 기준) ‘서울 재발견’이란 제목으로 정명섭 소설가가 서울 구석구석 숨어 있거나, 스쳐 지나치기 쉬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보물 같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정명섭은 왕성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역사를 들여다보며 역사소설과 인문서 등을 쓰고 있으며, <일제의 흔적을 걷다>라는 답사 관련 인문서를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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