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사저 ‘운현궁’을 가다

시민기자 이승철

발행일 2018.08.14. 15:15

수정일 2018.09.17. 16:57

조회 2,965

흥선대원군이 주로 생활했던 노안당

흥선대원군이 주로 생활했던 노안당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흥선대원군이 권세를 부리며 살던 집이란 말이지?”

“맞아! 며느리 명성황후와 권력다툼을 벌이던 곳이기도 하지”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64, ‘운현궁’을 찾았다. 조선 오백년의 역사가 비극으로 끝나가는 지점에서 일어났던 갈등과 권력다툼,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며느리 명성황후의 갈등이 얽힌 곳이라 더욱 궁금했다.

운현궁 안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관리와 경비를 담당했던 사람들의 거처였던 ‘수직사’가 먼저 보인다. 더 들어서면 대원군이 주요 정책을 논의하던 정치활동의 중심 공간이자 일상 공간으로 사용했던 ‘노안당’이 나타난다. 방 안에는 대원군이 붓을 들고 난을 치고 있는 모습과 빈객을 맞는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운현궁의 중심에는 ‘노락당’과 그 뒤편으로 ‘이로당’이 자리잡고 있다. ‘노락당’은 운현궁의 안채다. 1864년 노안당과 함께 건립됐다. 노락당의 당호는 대원군이 ‘아들이 왕이 되어 즐겁다’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곳은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의 생활공간이었다. 결혼이나 회갑연 등 큰 가족행사가 이뤄졌으며 며느리인 명성황후가 궁중예법과 가례 절차를 교육받고 가례를 치른 의례 공간이기도 하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는 1866년 3월에 치러졌다.

이로당은 노락당과 함께 운현궁의 안채 역할을 하던 건물이다. 1869년에 추가로 세워졌다. 이로(二老)는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민씨를 지칭하는 것으로 ‘두 노인을 위한 집’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대원군은 이곳에서 부인 민씨와 짧은 노년의 기간을 보냈다.

아름다운 운현궁 풍경

아름다운 운현궁 풍경

대원군은 자신의 똑똑한 아들이면서 장남이었던 재면을 왕으로 세우지 않고 당시 12세로 아직 나이도 어리고 조금은 어리숙한 차남 재황(명복)을 왕으로 세웠다. 당시 44세였던 자신이 왕의 생부인 대원군으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였다.

대원군이 초기 집권한 1863년 12월 8일부터 1873년 11월 5일까지의 10년은 개혁과 외척세력 견제, 그리고 왕권강화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 시기에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외부세력의 침범으로 쇄국정책이 강화되던 시기였다.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며느리 명성황후의 본격적인 갈등과 대립은 최익현의 탄핵상소로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난 후부터였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명성황후는 직접 정치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친정인 민씨 일가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다시 권좌에 복귀하려는 대원군과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대원군은 우선 아들인 고종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내세운 사람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반역을 시도한다. 1881년의 서자 이재선 사건, 그리고 뒤이어 장남 이재면을 앞세운 2차 반역사건, 손자 이준용을 앞세운 3차의 반역 사건이 그것이다. 그러나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며느리 명성황후는 물론 아들인 고종과도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다.

대원군의 끈질긴 권력욕은 2차와 3차의 재집권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집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1882년의 임오군란 때 잠시 재집권에 성공하는 듯 했지만 33일의 아주 짧은 기간으로 끝났다.

‘노안당’ 방 안의 대원군상(좌), ‘노락당’ 방 안의 가족상(우)

‘노안당’ 방 안의 대원군상(좌), ‘노락당’ 방 안의 가족상(우)

대원군의 끝없는 권력욕에서 비롯된 며느리 명성황후와의 갈등과 다툼은 당시 우리나라를 넘보고 있던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에게 이용만 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집권초기의 개혁정치와는 거리가 먼 정치적인 난맥을 보인 것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함으로서 구부갈등은 끝이 났다. 참으로 비극적이고 참혹한 결과였다.

고종은 1895년 대원군의 정치활동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해 그의 외부활동을 금지했다. 사실상의 가택유폐를 당한 것이다. 3년 후인 1898년 흥선대원군은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구한말 국가의 존망이 위태롭던 조선의 정치사를 관통했던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그들의 정치적 공과를 떠나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운현궁은 왕과 그 가족들이 거주하고 정사를 돌보던 서울의 5대 궁궐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 말기 격변기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장소다. 아직도 기온은 매우 무덥지만 조금 서늘한 시간에 친지나 가족들과 더불어 경내를 둘러보며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 건축미와 함께 약사에 담긴 이야기를 나누며 삶의 의미와 깊이를 더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운형궁 찾아가는 길
○교통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4번 출구 낙원산가 방향으로 100미터 도보

○사이트 : http://www.unhyeongung.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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