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거리에서 만난 전봉준 녹두장군

시민기자 이승철 시민기자 이승철

Visit1,846 Date2018.06.07 13:35

종로거리에 세워진 전봉준 장군의 동상

종로거리에 세워진 전봉준 장군의 동상

“어허~ 전봉준 녹두장군이 서울에 입성했네 그려”
“그러게 말이야, 언제 이곳에 녹두장군 동상이 세워졌지?”
종로1가 사거리, 지하철 종각역 5번 출구와 6번 출구 사이 영풍문고 앞에 녹두장군 전봉준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지난 4월 24일 동상 제막식이 있었다.

전봉준은 조선 말기 일본을 비롯한 외세 침략이 한창일 때, 관료사회가 부패하여 사회정의가 실종되고 하층민과 농민들은 극심한 수탈과 빈곤에 시달리던 시기, 농민군을 이끌고 혁명에 나선 사람이다.

혁명의 발단은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탐욕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조병갑은 농사용 민보를 축조한다는 명분으로 농민들을 강제 동원하고, 부당한 수세를 징수하여 가로챘을 뿐 아니라, 자기 아버지를 위한 비각을 건립하려고 농민들로부터 많은 돈을 수탈하는 등 착취와 악행을 저질렀다.

1893년 11월부터 전봉준이 주동한 농민들은 뜻을 모아 사발통문을 돌리며 봉기를 준비했다. 1894년 1월 11일 울분을 품고 일어난 농민들은 전봉준의 지휘로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이때 군수는 도망쳤지만 착취에 앞장섰던 아전들을 징벌했다. 전봉준은 관아에 있는 곡식을 풀어 농민들에게 분배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조병갑을 처벌한 뒤 장흥 부사 이용태를 파견했는데 그는 혁명에 참여한 농민과 가족들을 색출하여 학살하였다.

그해 3월 전봉준은 전라도 무장으로 피신하여 김개남 등과 함께 8,000여 명의 농민군을 모아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으로 발전하게 된다. 지배층의 착취와 주변 외세에 굴복한 무능한 정부, 일본의 경제적 침탈로 인한 농촌경제의 파탄 상황에서 동학의 인간평등, 사회개혁 사상이 바탕이 되어 혁명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황토현 전투의 승리로 승기를 잡은 농민혁명군은 한 때 전주 감영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정치 사회적으로는 부패하고 무능한 착취세력이었던 정부와 지배층에 대한 반봉건 사회운동이었고, 무능한 정부를 압박하며 경제침탈을 가하던 외세, 특히 일제에 맞선 반침략 국권수호 운동이었던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11월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함으로서 아쉽게 막을 내렸다.

전봉준 장군 동상 근처에는 조선시대 감옥이었던 전옥서(좌)와 한성신문 옛터(우) 표지석도 있다.

전봉준 장군 동상 근처에는 조선시대 감옥이었던 전옥서(좌)와 한성신문 옛터(우) 표지석도 있다.

관군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은 당시 감옥이었던 전옥서에 수감되었다가 처형당했다. 바로 현재 동상이 세워져 있는 곳이다. 실제로 동상 왼편으로 10여 미터 근처에 조선시대 감옥이었던 전옥서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또 오른편 10여 미터 근처에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3개월간 정간 당하고 자신도 90여 일간 옥살이를 한 장지연선생의 한성신문 옛터 표지석이 서있다.

지난 4월 24일 거행된 동상제막식은 동상건립 관계자들과 200여 명의 시민들이 참가하였다. 동상은 사단법인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이사장 이이화)가 2억7,000만 원의 국민성금으로 건립하였다. 동상건립부지는 시유지로 서울시의 승인으로 건립할 수 있었다. 동상은 원로 조각가인 김수현 충북대 명예교수가 화강암 좌대 위에 전봉준 장군이 앉아 있는 모습으로 제작하였다.

4월 24일은 1895년 전봉준 장군이 우금치에서 패전하고 체포되어 전옥서에 구금되었다가 처형되어 순국한지 123년째가 되는 날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이제, 종로거리를 오갈 때마다 근대사의 선각자이자 농민혁명가인 녹두장군 전봉준 선생을 기억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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