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현·한끼서울] 가로수길 마라탕

정동현

발행일 2018.01.29. 16:02

수정일 2018.02.28. 16:17

조회 1,945

`진스마라` 마라탕

`진스마라` 마라탕

진스마라-지도에서 보기

정동현 맛있는 한끼, 서울 (27)강남구 진스마라

신사동 가로수길에 먹을 만한 식당은 없다. 특히 2차선 도로가 뻗어 있는 대로변은 더욱 그렇다. 길가에 음식점과 카페가 가득하고, 어깨가 딱 벌어진 남자들과 맵시를 한껏 뽐내는 여자들이 그곳을 메우던 시절은 갔다. 이제 외국에서 들어온 옷가게와 ‘서울은 쇼핑하기 좋은 도시’라고 말하는 외국인들, 프랜차이즈 화장품 가게들뿐이다. 거리에 인적은 눈에 띄게 줄었고 시간 흐름도 느려졌다. 어떻게든 임대료를 회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가게들은 절박한 분위기마저 감돈다.

가로수길 임대료가 크게 치솟아 웬만한 식당들이 견디지 못할 지경이 된 것은 최근 일이 아니다. 덕분에 알 만한 사람들은 가로수길에서 먹을 곳을 찾지 않는다. 대신 가로수길에서 일행을 만나 더욱 후미진 곳으로 들어간다. 가로가 아닌 ‘세로수길’이란 별칭을 얻은 좁은 골목 골목에는 맹수를 피해 모여든 초식동물처럼 작은 식당들이 모여들었다.

발렛 기사의 퉁명스러운 말도, 요란스러운 호객도 없는 그 길은 야트막한 산 사이를 흐르는 냇물처럼 가늘고 길며 바르지 않고 조금씩 굽어져 있다. 가게들은 저마다 간판을 달고 있지만 때로 너무 작아 발걸음을 늦추고 고개를 두리번거리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기도 한다.

가로수길 진스마라 외관

가로수길 진스마라 외관

기록적인 한파를 갱신하던 서울의 겨울날 ‘진스마라’를 지나칠 뻔 했던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기억으로는 여러 번 그 앞을 지난 것 같았다. 작은 스마트폰에 의지한 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히 길을 걸었다. 50m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인터넷 지도 위에 우리는 작은 점이 되어 깜빡였다. 그리고 그 점은 진스마라를 표시한 또 다른 점을 지나 있었다.

구로와 건대가 아닌 세로수길에 있는 진스마라는 맵고 뜨겁다는 마라탕면을 파는 곳이다. 가로수길이 뜨던 시절, 마라탕면을 먹으려면 동대문과 동묘 사이 풍물시장이 있는 언저리에 가거나 비행기가 낮게 떠서 나는 가리봉동, 혹은 공장이 모여 있는 경기도 안산까지 가야했다. 그곳에 가면 한글이 드물고 한국말이 잘 통하지 않았으며 거리 냄새도 달랐다.

시간이 흘러 가로수길은 쇠락하고 마라탕집은 서울 외곽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90년대 북경 사람들이 마라탕에 빠져들 때처럼 한국 사람들도 맵고 뜨거운 마라 맛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진스마라 식당 내부 모습

진스마라 식당 내부 모습

마라탕은 서울에서 가장 첨단을 달린다는 신사동 한복판에서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번체로 쓰여 알아보기 힘든 한자 간판이 아닌 영어 상호에 깔끔한 하늘색 바탕 간판을 단 진스마라는 마라탕을 파는 곳 같지 않았다.

나의 편견에 따르면 마라탕을 파는 곳은 으레 시끄럽고 낡았으며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스마라는 마치 깔끔한 파스타 한 그릇을 먹기 위해 들른 곳처럼 깨끗하게 정돈 되어 있었다. 펼침 종이로 만든 메뉴판에는 진스마라를 만든 사람이 ‘진’이며 그녀는 21살에 한국에 온 중국 유학생이란 것이 적혀 있었다. 그녀가 고국에서 먹던 마라탕을 그리워하자 그녀 어머니가 마라탕을 배워 재현해줬으며 그 레시피로 이 진스마라를 열게 된 것이라고 했다.

셀프바에서 먹고 싶은 재료를 원하는 만큼 담아 중량에 따라 가격을 지불하고 먹을 수도 있다

셀프바에서 먹고 싶은 재료를 원하는 만큼 담아 중량에 따라 가격을 지불하고 먹을 수도 있다

점심식사 때가 한참 지난 시간이었지만 가게 안에는 식사를 하는 커플이 앉아 있었다. 영국식 사냥 모자를 쓴 남자와 역시 영국식으로 위가 동그란 모자를 쓴 여자가 서로 휴대폰을 보며 마라탕 한 그릇과 꿔바로우 한 접시를 테이블에 놓고 나눠 먹었다.

테이블에 앉아 전혀 중국 억양이 느껴지지 않는 한국말로 종업원이 주문을 받았다. 그녀는 우리 주문을 주방에 중국말로 주문을 넣었다. 한편에 마련된 셀프바에서 여느 마라탕집과 마찬가지로 손수 재료를 퍼 담아 조리를 부탁할 수도 있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마라탕 단품을 시킬 수도 있다.

마라를 넣어 볶은 국수인 `마라샹궈`

마라를 넣어 볶은 국수인 `마라샹궈`

우리는 마라탕과 마라양념을 넣고 해산물을 볶은 마라샹궈, 중국식 탕수육인 꿔바로우를 시켰다. 마라탕과 마라샹궈는 매운맛을 조절할 수 있다는 설명에 안전하게 ‘중간맛’을 선택했다. 달그락 거리며 웍 돌리는 소리가 났고 곧이어 음식이 나왔다.

혀를 때리고 입 안을 달구는 마라 맛은 제피라고 부르는 사천후추, 그리고 건고추로 내는 맛이다. 이 두 재료가 뜨거운 열을 만나 매운맛을 토해내고 그 맛은 그대로 몸에 전달되어 통증과 흥분을 부른다. 스톡홀름 신드롬처럼 그 통증에 가까운 맛에 익숙해지면 다른 맛은 너무 밋밋하게만 느껴진다.

진스마라에서 맛본 마라탕에는 미칠 것 같이 뜨거운 야성의 맛은 없었다. 대신 잘 다듬어져서 한적한 오후에 조용히 젓가락질을 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중국식 탕수육 `꿔바로우`

중국식 탕수육 `꿔바로우`

주문이 들어오자마자 볶아낸 마라샹궈 속 채소 질감에서 가스불을 그대로 받아 빨갛게 달궈진 웍의 열기가 느껴졌다. 커다랗게 튀겨 가위로 잘라 먹는 꿔바로우는 단맛과 신맛이 교차로 엇갈려 먹을수록 침이 흘러나왔다.

음식 맛보다 더 좋았던 것은 깨끗하게 정리된 식당과 늘 고맙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 접객이었다. 테이블 위에 올라온 음식을 다 먹었을 때 떠오른 것은, 타지에 정착하기 위해 덜 자고 더 뛰었을 그녀의 하루였다. 알차고 단단한 마라탕 한 그릇과 작지만 단정한 가게. 차가운 바람 때문에 이마에 흐른 땀은 곧 사라졌지만 몸에 남은 잔잔한 열기는 쉽게 꺼지지 않았다.

정동현대중식당 애호가 정동현은 서울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한 끼’를 쓴다. 회사 앞 단골 식당, 야구장 치맥, 편의점에서 혼밥처럼, 먹는 것이 활력이 되는 순간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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