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현·한끼서울] 논현동 이북냉면

정동현

발행일 2017.10.30. 16:50

수정일 2018.02.28. 16:11

조회 1,600

정동현 맛있는 한끼, 서울 (20) 강남구 평양면옥

냉면

이북냉면-지도에서 보기

선배는 선글라스를 쓰고 파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파란 하늘이 까만 선글라스 위에 비추었다. 씩 웃는 선배 얼굴을 보며 나는 손을 흔들었다. 편의점에서 산 캔커피를 마시던 선배가 악수를 청하고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다.”

영상 10도를 하회하는 낮 최고 온도와 선배가 든 캔커피는 썩 잘 어울렸다. 나도 선배를 따라 그 파란 탁자 앞에 앉았다. 찬바람에 몸을 움추렸다. 어떻게 지냈냐 따위의 이야기를 나눴다. 큰 일 없이 별 일 없이 흘러가는 하루 하루였다. 근래 벌어진 가장 대단한 일이 바로 오늘 점심 식사일거란 농담을 던졌다. 그쯤 멀리서 중절모를 쓴 남자가 걸어왔다. 며칠 전 지나가는 말로 던진 약속이 실현된 순간이었다. 입에서 김이 나오는 점심 나절, 우리 셋은 논현동 평양면옥으로 들어섰다.

평양면옥

많은 노포(老鋪)들이 그렇듯, 이 집도 가지치기를 하듯 혈연관계에 따라 여러 분점을 거느리고 있다. 본류로 치는 곳은 장충동. 그 곳은 큰아들이 맡고 논현동은 그 어머니가 작은아들과 함께 맡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외 백화점에 들어가 있는 분점도 있다.

창업주가 있고 그 창업주 자식들이 커감에 따라 가게를 하나씩 떼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노포가 분점을 낼 수 있는 가장 큰 조건은 창업주 자식 연령대다. 혈연이 아닌 타인에게 가게를 내어주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그 날은 분명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하얀 머리 할머니가 우리를 방 안쪽으로 안내했다. 누가 작은 아들인지 분간할 이유도, 틈도 없었다. 그저 빨리 따뜻한 방바닥에 엉덩이를 지지고 싶을 따름이었다. 보지 않아도 외울 수 있는 메뉴판을 굳이 다시 한 번 살펴봤다.

만두

“일단 소주 하나에 제육 한 접시 주세요.”

내가 메뉴판을 보는 사이 주문이 들어갔다. 날이 차서 맥주는 시키지 않았다. 어차피 할 일 없는 오후, 남들처럼 냉면 한 그릇을 마시듯 먹고 자리에서 일어날 필요도 없었다. 대신 가게에 딸린 방 제일 안 쪽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면 되는 나날이었다. 곧 뜨겁게 삶아낸 돼지수육과 소주 한 병이 도착했다.

오래된 냉면집에서는 돼지수육은 제육, 소고기수육은 편육이라고 다른 이름을 붙여 부르는데 그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돼지 저(猪)자가 변이를 일으켜 ‘제’자로 변했다는 설도 있다. 나는 언어학자도, 민속학자도 아니기에 그 기원에 대해서는 별 의견이 없다. 그저 오래전부터 으레 그래왔듯이 오래된 이름을 부르는 오래된 가게에 앉아있었을 뿐이다.

기본반찬

끝이 닳은 젓가락으로 수육 한 점을 집어 올리고 새우젓을 찍었다. 잠시 후 뜨겁고 부드러우며 기름진 고기를 씹었다. 새우젓의 점잖은 짠맛과 감칠맛이 수육의 푸근한 맛에 잘 어울렸다. 비계는 단맛을 내며 녹아내리고 살코기는 잘게 부서졌다. 우리는 입 안 잡맛을 씻어 내리듯 독한 술 한 잔을 동시에 비웠다.

그 다음은 애기 주먹만 한 만두 한 접시를 시켰다. 한 입에 만두 하나를 다 넣을 자신이 없었다. 근육질 사내처럼 빈틈없이 소가 꽉꽉 들어찬 만두를 젓가락으로 찢었다. 숙주나물과 두부, 갈은 고기가 하얀 김 속에 어른거렸다. 양념간장을 떠 살살 만두 위에 뿌리고 숟가락으로 만두를 퍼먹었다. 담백한 것들이 어우러진 맛은 바보 같은 친구처럼 모난 구석이 없었다. 아마 그쯤 소주 몇 병이 탁자 위에 올랐을 것이다.

편육

그 술처럼 맑은 육수를 품은 냉면을 한 그릇 씩 시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육수를 마시자 찬 기운이 몸속으로 밀려들어왔다. 파란 하늘이 그대로 몸속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얼음을 깨고 그 속으로 흐르는 시냇물을 마신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고 몸이 맑아졌다. 이에 닿으면 툭툭 끊기는 면을 소처럼 우걱우걱 씹었다. 얼마 안 되어 빈 냉면 그릇에 얼굴이, 서로의 얼굴이 비췄다.

시고 단 무김치를 씹으며 이야기를 나눈 것이 그 뒤로 몇 분이었다. 서로에게 바라는 것 없었다. 허허롭게 모여 맑은 것들을 먹고 툭툭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 여전히 날은 푸르고 공기는 차가웠다. 옷깃을 여몄다. 그러나 속이 따뜻해 그리 춥지는 않았다.

메뉴 및 가격

정동현대중식당 애호가 정동현은 서울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한 끼’를 쓴다. 회사 앞 단골 식당, 야구장 치맥, 편의점에서 혼밥처럼, 먹는 것이 활력이 되는 순간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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