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사랑한다면 ‘이곳’만큼은...

시민기자 조시승

발행일 2017.06.15. 13:38

수정일 2017.06.20. 13:55

조회 2,105

전쟁기념관 형제의 상, 한국전쟁 당시 전쟁터에서 국군과 북한군으로 만난 형제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조시승

전쟁기념관 형제의 상, 한국전쟁 당시 전쟁터에서 국군과 북한군으로 만난 형제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과 국토방위를 위해 전투에 참여하여 산화한 전몰장병을 추모하고 명복을 기원하는 달이다. 동시에 유가족에게 조의를 표하고, 온 국민이 나라와 애국에 대해 생각하는 날이 이어진다.

6월,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며 애국지사들의 희생을 기릴 수 있는 곳, 4군데를 추천한다.

전쟁기념관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은 옛 육군본부가 있던 곳에 건립했다. 한국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통해 호국정신을 배양하고, 선열들의 호국 위훈을 추모할 목적으로 다양한 자료수집과 보존전시를 하고 있다. 기념관은 지하 2층에서 지상 4층 규모에 9,000여 점의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은 옥내전시와 옥외전시로 구분되어 있다.

전쟁기념관의 평화의 시계탑. 두 소녀를 통해 통일열망과 평화기원을 상징화했다. 한 소녀가 안고 있는 시계는 6.25전쟁과 함께 멈춰버린 시간을, 또 한 소녀가 안고 있는 시계는 현재의 시간을 나타낸다. ⓒ조시승

전쟁기념관의 평화의 시계탑. 두 소녀를 통해 통일열망과 평화기원을 상징화했다. 한 소녀가 안고 있는 시계는 6.25전쟁과 함께 멈춰버린 시간을, 또 한 소녀가 안고 있는 시계는 현재의 시간을 나타낸다.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면 6·25전쟁과 월남전 등에서 전사한 국군 장병과 UN군 전사자를 기리는 명비(名碑)가 눈에 띈다. 전시실은 총 9개로 호국추모실, 전쟁역사실, 6·25전쟁실Ⅰ·Ⅱ·Ⅲ, 해외파병실, 국군발전실 등이 있다. 비행기와 대포 등을 전시하는 대형·방산장비실과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어린이 박물관은 많은 관람객이 찾는 공간이다.

호국추모실은 국가를 지킨 선열들을 추모하는 전당으로 호국 인물들의 흉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영상과 모형, 디오라마, 3D 등으로 표현해 입체감 있게 전시하고 있다.

어린이박물관은 2014년, 어린이들에게 전쟁 역사를 통해 자유,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개관했다. 놀이와 체험으로 전쟁 역사를 배우고, 무기 등을 관람할 수 있다. 을지문덕의 활약상 등 다양한 역사이야기를 애니메이션과 그림책으로 친근감 있게 볼 수 있다.

■전쟁기념관 안내
○ 주소 :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 29
○ 시간 : 오전9시 ~ 오후6시(매월 마지막 수요일 오후 8시까지), 매주 월요일 정기 휴관
○ 입장료 : 무료
○ 교통 : 지하철 6호선 삼각지역 12번출구 도보 3분, 4호선 1번출구 도보 5분
○ 홈페이지 : www.warmemo.or.kr
○ 문의 : 02-709-3139

6월, 국립서울현충원 묘역 전경 ⓒ조시승

6월, 국립서울현충원 묘역 전경

국립서울현충원

국립서울현충원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순국한 호국영령들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다. 조국광복과 국토방위를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영면해 있는 민족의 성역이다. 한민족의 얼과 호국의지, 나라사랑, 겨레정신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성스러운 장소다.

정문 앞 꽃시계를 지나 현충문으로 들어가면 현충탑에 있는 위패봉안관이 보인다. 벽면에 6·25전쟁, 베트남전쟁 전사자명부가 가득하다. 군데군데 이름이 지워져 있는 것은 포로로 잡혀 있다가 탈출에 성공한 경우이다. 그 대표적 인물이 조창호 소위다. 그가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자원입대했다.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에서 중공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고, 그 후 강제로 북한군에 편입되었다가 탈출기도와 발각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가 늙고 병들자 감시가 소홀해졌고, 그 틈을 타 탈출에 성공해 1994년 10월, 43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그는 현충탑 지하 영현 봉안실의 대리석 위패에 새겨져 있던 자신의 전사자 명부를 직접 지웠다.

위패봉안관에 있는 영혼승천상, 전사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조시승

위패봉안관에 있는 영혼승천상, 전사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사병묘역에 낯익은 이름과 함께 좀 특이한 묘비가 하나 있다. 바로 초대 주월한국군 사령부 사령관, 채명신 장군의 묘소다. 죽어서도 베트남전 참전 전사자와 함께 하겠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이곳, 사병묘역에 안장되었다.

이 외에도 현충원에는 6·25전쟁 중에 장렬히 산화(散華)한 많은 호국영령들이 안장돼 있다. 19살, 꽃다운 나이에 6·25전쟁에 참전해 장렬히 생을 마감한 두 형제(이만우, 이천우)의 묘소, 공군이라는 한길을 걸은 부자가 조국 영공을 지키다 생을 마감한 부자(박명렬, 박인철)의 묘소 등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다.

국립서울현충원에는 8곳의 묘역이 있다. 국가원수(대통령)묘역, 임시정부요인묘역, 애국지사묘역, 무후선열제단(후손 없는 선열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 국가유공자묘역, 장군묘역, 장병묘역, 경찰묘역, 외국인묘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임시정부요인묘역에는 상해 임시정부 두 번째 대통령이자 ‘한국통사’, ‘독립운동지형사’를 서술해 민족혼과 자긍심을 일깨운 역사학자, 박은식 선생의 묘소가 있다. 애국지사 묘역에는 19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사살한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묘소가 있다. 캐나다인 스코필드 박사의 묘소도 있다. 그는 일제의 침략과 3·1운동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광복 후 다시 한국에 돌아와 많은 활동을 했다.

■국립서울현충원 안내
○ 주소 : 서울시 동작구 현충로 210
○ 시간 : 매일 오전6시~오후6시, 연중 무휴
○ 교통 : 지하철 4호선 동작(현충원)역 4번 출구, 9호선 동작(현충원)역 8번 출구
 버스 350,351,352,360,462,640,642,752,5524,6411 국립서울현충원 하차
○ 홈페이지 : www.snmb.mil.kr
○ 문의 : 02-815-0625

독방에 홀로 갇혀 정신병을 얻은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좌), 서대문형무소 내 고문실(우) ⓒ조시승

독방에 홀로 갇혀 정신병을 얻은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좌), 서대문형무소 내 고문실(우)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한번은 꼭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가보길 바란다. 한국 역사상 가장 어둡고 힘들었던 시기가 바로 일제강점기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그 당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 역사를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1875년 9월 일본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초지진에 불법 침투하여 정박하고, 닻을 내려 바다 깊이를 재는 등 조선군을 의도적으로 자극했다. 조선군은 일본군에게 돌아가라며 경고 대포를 쏘았다. 운요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에 맞서 대포를 쏘아 초지진에 많은 피해를 입히고 돌아갔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손해배상을 요구했고 군사력을 앞세워 1876년 강화도조약을 강제로 체결한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했다. 1910년 한일합방조약 체결로, 국권을 빼앗기는 치욕을 맛보았다.

이 같은 불법, 불평등, 강제 조약 체결로 인해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고, 1919년 국내에서도 3.1운동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이 이뤄졌다. 1908년 일제는 저항하는 사람들을 가두기 위해 ‘경성감옥’이 세웠고, 이것이 ‘서대문형무소’의 시작이다. 서대문형무소는 1988년 감옥으로서의 기능이 끝나기까지 80년간 일제에 복종을 강요하는 위협적 상징으로 이용되었다.

일본은 독립 운동가들을 모두 잡아 서대문형무소에 가두고 고문했다. 이곳에서 수많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잃었다. 일제는 애국지사를 처형한 후, 이를 은폐하기 위해 시신을 형무소 밖 공동묘지까지 운반할 수 있도록 비밀통로, 시구문을 만들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는 독립운동가들이 형무소에서 입었던 옷, 고문에 쓰인 기구 등 호국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하 1층에는 일제가 애국지사를 고문했던 임시구금실과 고문실을 재현해놓았다. 특히 몸을 거꾸로 매달고 코에 고춧가루 물을 붓는 고문, 손톱 아래로 뾰족한 나무를 찌를 고문 등 끔찍한 고문 내용을 듣고 눈물을 훔치는 관람객도 많다.

일제강점기 당시 수감자들은 고문을 받은 후에도 쉴 수 없었다. 매일 10시간 이상 노역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작사에서는 노역에 관한 전시를 볼 수 있다. 노역이 끝나면 옥사로 가는데, 평당 7~9명이 들어가 제대로 앉을 수도 없는 공간이었다. 잠도 교대로 자야 할 정도로 협소한 공간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옥사 내에서는 배변활동까지 이루어져 상당히 비위생적이었다. 음식도 제대로 주지 않아 영양실조와 혹사로 죽어 나가는 사람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다른 건물과 조금 동떨어진 곳에서 사형장을 볼 수 있다. 1923년 일제가 지은 목조건물로,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해 전국에 투옥된 애국지사들이 사형 당한 장소이다. 이곳은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안내
○ 주소 : 서울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 시간 : 여름철(3~10월) : 9:30~18:00, 겨울철(11~2월) : 9:30~17:00
○ 입장료 : 일반 3,000원, 청소년·군인 1,500원, 어린이 1,000원
 6세 이하·65세 이상·장애인 및 국가유공자 무료
○ 교통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 버스 471,701,702,7019,7021번 ’독립문정류장’ 하차
○ 홈페이지 : www.sscmc.or.kr
○ 문의 : 02-360-8590

노들나루공원 참배광장의 한강방어선전투 전사자 명비 ⓒ조시승

노들나루공원 참배광장의 한강방어선전투 전사자 명비

한강방어선전투기념비

2016년 10월 28일 동작구 노들나루공원에서 서울보훈청장, 동작구청장, 동작경찰서장을 비롯해 약 200여 명이 모여 ‘한강방어선 전투전사자 명비 제막식’이 진행되었다. 한강방어선전투는 전술적 측면에서는 주목도가 낮지만, 실질적으로 한국 육군의 재편성과 미군 참전시간을 얻은 전략적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노들나루공원에 ‘한강방어선전투기념비’와 양화동에 ‘한강방어백골부대전적비’가 그들의 한강방어를 위한 전투 성과를 말해준다.

북한 인민군은 1950년 6월 25일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의 경계를 넘어, 38선 이남으로 진격했다. 당시 무방비 상태였던 경기도 북부와 수도권 지역은 삽시간에 휩쓸렸다.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자 육군은 한강 남쪽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기로 결정한다.

국군은 6월 29일 밤부터 한강을 건너기 시작한 북한군과 맹렬히 싸워, 7월 3일까지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었다. 비록 장비와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방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6일간의 지연전을 통해 흩어진 병력을 수습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천상륙작전으로 유명한 맥아더 장군의 한강방어선 방문을 이끌어내며 미국의 참전을 가속화시켰다.

■ 한강방어선전투기념비 안내
○ 위치 : 서울시 동작구 본동 노들나루공원
○교통 : 지하철 9호선 노들역(구 노량진역) 1, 2번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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