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세울 수 없나요? 가스불 안끄고 왔어요”

최경

Visit918 Date2017.04.14 15:34

기차ⓒ뉴시스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65) 인삼 두 뿌리 대추 세알

#씬 1.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그렇다고 아주 먼 옛날도 아닌 때 있었던 실제 이야기다. 지방 중소도시에 사는 독신여성 A씨는 어느 봄날, 출장길에 올랐다. 서울로 가는 가장 마음편한 교통편은 열차를 타는 것이었다. 자주 서울을 오간 터라, 미리 표를 예매하지 않아도 평일 오전엔 한가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시간에 맞춰 늦지 않게 일어난 덕분에 아침밥을 거르는 일도 없었다. 다만 지인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통 때문에 예상보다 출발이 조금 늦어졌을 뿐이다. 기차시간에 맞춰 서둘러 집을 나선 그녀, 다행히 제시간에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순조롭고 평화로웠다. 서울본사의 회의는 따로 준비해갈 것도 없고 참석해서 열심히 메모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서울에 간 김에 친구를 만나볼까. 아니면 백화점에 가서 눈 호강을 해볼까 이런저런 궁리로 설레기까지 했다. 적어도 옆에 앉은 할머니가 보온병에서 차를 따라 마시기 전까지는.

#씬 2.
119 소방서에 화재출동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대원들은 신속하게 차에 올라 달리기 시작했다. 도착지는 한 아파트. 그런데 신고내용이 좀 이상했다. 화재출동이긴 한데, 화재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으니 가서 확인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신고를 해온 곳은 역무원이었는데 자신의 집이 아니라 승객의 집이라고 했다. 신고된 집은 저층 아파트 3층, 확인을 위해 초인종을 눌렀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현관문을 통해 뭔가 타는 듯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대원들은 곧바로 베란다를 통해 진입하기 위해 굴절차 사다리를 펼쳤다.

#씬 3.
무궁화호 열차는 어느덧 수원 가까이 달리고 있었다. A씨 옆에 앉은 할머니가 보온병을 열자, 구수한 인삼차 향기가 코끝에 스쳤다. 익숙한 향기였다.

“집에서 끓여온 인삼차인데 같이 마실래요?”

할머니가 인심 좋게 웃으며 물었다. 그 순간, A씨의 뇌리 속에 번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동시에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대답 대신 자리에서 용수철 튕기듯 일어선 A씨. 그러나 어디로 가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기차를 세워야 하는데, 집에 가야 하는데…”

계속 중얼거리던 그녀는 무작정 앞으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달리는 기차를 어떻게 세울 도리는 없었다. 하얗게 질린 채 우왕좌왕 하던 그녀가 열차승무원을 만난 건, 10여분이 흐른 뒤였다.

“기차역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저 빨리 내려야 돼요. 집에 가야 해요. 큰일 났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집에, 집에… 가스 불을 안끄고 나온 것 같아요. 인삼 달이고 있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큰일 났네. 집에 불났으면 어떻게 해요. 빨리 가야 해요.”

A씨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울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인삼을 달이기 시작했는데, 기차시간에 늦을까봐 서두르면서 가스 불을 끄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옆에 앉은 할머니가 인삼차가 든 보온병을 열지 않았다면 아마 더 늦게 알아차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알았다 해도 방법이 딱히 없었다. 사정을 들은 승무원도 마음이 급해졌다.

“조금 있으면 수원역 도착인데, 집에 가신다 해도 늦어요.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게요.”

역무원은 무전으로 즉시 연락을 취했다. 그때부터 신속한 연락 릴레이가 이어졌다. 달리는 기차에서 가장 가까운 역으로 다시 A씨가 사는 중소도시의 역으로, 그곳에서 119 소방서로 신고가 이어진 것이다.

#씬 4.
119대원이 굴절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베란다의 창문은 다행히 한쪽이 열려 있었다. 뭔가 타는 듯한 냄새가 솔솔 풍겨 나왔다. 아무도 없는 빈 집, 가스레인지 위에선 냄비가 올려져 끓고 있었다. 가스 불을 끈 대원이 뚜껑을 열었다. 연기와 함께 인삼 두 뿌리와 대추 세알이 쫄아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상황종료!

#씬 5.
수원역에 내린 A씨는 역무원 사무실에서 초조하게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뻘건 화염과 까맣게 타버린 집, 불길이 윗집으로 번져 아비규환이 되는 온갖 나쁜 상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만약 불이 나버렸다면 이 엄청난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막막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역무원이 누군가와 통화를 마치고 A씨에게 다가왔다.

“안심하셔도 돼요. 소방서에서 가스 불 껐답니다. 다행히 불나기 전이었다네요. 이제 서울 가셔도 되겠어요.”

일순간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A씨. 그녀가 울먹이며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녀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었던 인삼 두 뿌리 대추 세알은 까맣게 그을어버린 냄비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그 후로 A씨는 현관문에 ‘가스 불’ 이라고 커다랗게 써 붙이고 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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