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도 모르고 늙음이 찾아왔다

최경

Visit708 Date2017.04.07 14:33

매화ⓒ이은경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64) 나이든 건 미안한 걸까?

예견된 일이었다. 방송에 사자성어가 등장하면 곧바로 인터넷 포탈사이트의 검색어에 오를 때 짐작했어야 했다. 미련하게 그것도 모르고 신기해했다. ‘설마 이 사자성어 뜻을 몰라서 검색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그거였다. 방송에 나오는 단어의 뜻이 뭔지 모르거나 정확한 뜻을 알고 싶어서 검색을 한 것이었다. 매주 방송을 제작하면서 막바지에 하는 일은 제목과 함께 마지막에 제작진의 생각을 담는 몇 문장의 메시지를 확정하는 일이다. 모두 모여앉아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며, 제목이 주제를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 메시지가 얼마나 인상에 남게 할 것인지 고심하고 또 고심한다. 시청자들은 흘려보낼 수도 있는 것인데도 제작진들은 머리를 쥐어짠다. 그래봤자 정작 방송을 보면 허무하게도 몇 초만에 훅 지나가버리고 만다. 그걸 알면서도 매번 모여 앉아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날도 제목을 놓고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다. 한 청년이 부모를 찾는 사연에 대한 제목을 고민하다가 내가 불쑥 떠올린 단어는 ‘혈혈단신(孑孑單身)’이었다.

“혈혈단신 ○○씨의 뿌리 찾기, 이건 어때요?”
“헉, 너무 옛날 느낌인데요. 혈혈단신 이런 단어 요즘 잘 안 쓰잖아요.”
“이걸 제목으로 하면 혈혈단신 단어가 검색어 순위에 오를걸요?”

늙었나 보다. 얼마 전부터 어떤 일상적인 단어를 쓰면, 후배들이 웃는다.

“선배님이 쓰는 단어는 참 고풍스러워요. 어릴 때 할머니한테 들어봤던 말들이 새삼 생각나요.”

처음엔 농담처럼 들렸다. 낄낄거리면서 함께 웃었는데 몇 번 반복되다 보니 나도 어쩔 수 없이 꼰대가 돼 가나보다 싶기도 해서 씁쓸하다. “예전에 내가 프로그램 할 때는…”, “예전에 비슷한 아이템 한 적이 있는데…”, “나도 예전엔 그랬는데…” 과거가 자꾸 튀어나온다. 다행히 착한 후배들은 잘 들어준다. 심지어 재미있어 하면서 (어쩌면 재미있는 척 해주면서) 이야기를 들으며 마지막엔 코멘트를 잊지 않는다.

“선배님 이야기는 꼭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극적이에요. 옛날이야기 듣는 것 같아요.”

가슴에 또 화살이 날아와 박힌다. 분명 고의로 쏜 화살은 아닌데 나 혼자 화살로 만들어 상처를 받는다. 아, 늙었나보다. 나이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야 한다는 웃지 못 할 농담이 이제 내 문제가 돼 버렸다. 개그프로그램에서 꼰대, 아재 부장이 등장해 거침없고 되바라지기까지 한 젊은 사원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모습에 방청객들이 통쾌해하며 환호하는 걸 보면 한편으론 무섭기까지 하다.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답이야?”, “말을 시키니까 대답을 하죠~” 요즘 트렌드가 뭔지도 모르고 시대에 뒤떨어진 농담이나 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유머러스하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부장이고 직장 상사이고 선배라는 사람이라는 식이다.

늙었다. 어느새 그렇게 돼 버렸다. 누구도 나이 드는 것을 거스를 수 없다. 다만 어떻게 나이 드는가 그것이 문제일 뿐이다. 존경받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존경할 만큼 뭔가 이뤄놓은 것이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저 서로 불편해하지 않는 범위를 스스로 잘 찾는 것, 내가 알게 모르게 축적해온 노하우를 잘 전해주는 것. 나이 들어서 고리타분해지는 것이 아니라 보다 지혜롭고 현명해지는 것, 그래서 필요한 사람으로 남는 것, 이것마저 노욕으로 오인되지 않게 하는 것… 그러고 보면 참 살아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이 들수록 섭섭한 게 많아진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한 소설에서 이런 대목이 나온다.

“너희 젊음이 너희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뭣도 모르고 젊음을 소비했고 뭣도 모르고 늙음이 찾아왔다. 한 인생이 상도 벌도 아닌 자연의 법칙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이, 이 흐드러진 봄날 새삼 가슴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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