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는 세운상가, 그 현장에 가다!

시민기자 이현정

Visit1,612 Date2017.03.03 16:32

세운전자상가 뒤편ⓒ이현정

세운전자상가 뒤편

누군가에겐 두툼한 브라운관 TV나 턴테이블, 워크맨 같은 아날로그 제품들을, 또 다른 누군가에겐 납땜질해가며 라디오나 무전기 등을 만들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빽 판(불법복제LP판)과 빨간 비디오의 은밀한 기억을 떠올리는 이들도 적지 않으리라.

그렇게 추억 속으로 잊혀가던 ‘세운상가’가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아날로그 세대 기술장인들의 내공과 스마트 세대 청년들의 열정이 4차 산업 기술과 만나 실험 개발부터 제품 제작과 상품화까지 할 수 있도록 하는 ‘4차 산업혁명의 플랫폼, 전진기지’로 변화를 꾀하고 있다는데, ‘다시 세운’ 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켜켜이 쌓인 역사를 담은 ‘다시 세운’

세운상가 자리는 일제시대 때 소개공지 즉, 폭격에 대비해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빈 공터였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무허가 판자촌이 들어섰고, ‘종삼’이라 불리는 거대한 사창가도 생겨났다.

1966년,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이곳에 현대식 건물을 짓는 정비사업을 추진했는데, 불도저라는 별명에 걸맞게 단 몇 달 만에 싹 밀어내고 착공 2년 만에 완공했다. 남북으로 1㎞에 걸친 소개공지 지형대로 현대, 세운전자, 세운청계, 세운대림, 삼풍, 풍진, 신성, 진양상가 등 7개의 건물이 들어섰다.

1층에서 4층은 상가, 5층 이상은 주거공간으로 이루어진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었는데, 건물 안에서 모든 생활이 가능하도록 내부에 슈퍼마켓은 물론, 교회, 실내 골프장, 피트니스 클럽 등을 갖추고 있었다. 내부 보일러 시스템과 수세식 화장실, 엘리베이터까지 설치한 당시로썬 그야말로 최신식 건물이었다. 서울의 명소로 떠오르며, 영화배우와 정치인 등 유명인사들이 앞다투어 입주했다.

70~80년대에는 종합 전자상가이자 제조공장이었던 세운상가ⓒ이현정

70~80년대에는 종합 전자상가이자 제조공장으로 호황을 누렸던 세운상가

세상의 기운이 다 모이라는 뜻으로 ‘세운’이라 이름 지었다는데, 1970~80년대에는 종합 전자 상가이자 제조공장으로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강남 개발과 용산전자상가 조성 등으로 주민과 상인들이 이전하며, 90년대 이후 쇠락, 슬럼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2008년, 대규모 철거 재개발 계획에 따라 재정비 사업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민간 개발사업자가 나타나지 않아 갈등만 낳고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대책 없이 멈춰있던 세운상가에 ‘도시 재생’이라는 새로운 해법이 선보인 것은 2016년 1월. 역사와 환경을 보존하고, 주민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며, 기존 인프라를 활용해 지역 자생력을 강화하는 ‘다시 세운 프로젝트’가 추진됐다.

4차 산업혁명의 플랫폼, 전진기지로 ‘다시 세운’

그렇다면 세운상가는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까?

지난해 세운상가에서는 세운상가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프로젝트 ‘세운리빙랩 베타버전’이 진행되었다. 세운상가 구석구석에 입주한 청년들은 사무실에서 사용할 공기청정기를 직접 만들고, 팀을 이뤄 다양한 loT 조명이나 오락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모두 세운상가 일대에서 구한 부품들로 세운의 기술장인을 멘토 삼아 만든 것들이었다. 또한, 이곳 세운에서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진 세계 최초 점자 스마트시계는 해외로부터 선주문 400억 원을 수주, 주목받는 스타트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조립 가능한 3D 프린터를 개발한 이동엽 대표가 세운 기반들을 활용해 제품을 제조한 경험을 설명하고 있다.ⓒ이현정

조립 가능한 3D 프린터를 개발한 이동엽 대표가 세운 기반들을 활용해 제품을 제조한 경험을 설명하고 있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땐 재료 사는 것도 힘들고 상점도 없어 굉장히 불편했어요. 그러다 이곳 세운상가까지 오게 되었는데 깜짝 놀랐죠. 캐나다에 있을 땐 공구부품은 쉽게 사지만 가공하려면 중국으로 연락하라는 등 창작이 안 됐거든요. 그런데 이곳 세운에선 안되는 게 없더라고요.” 재외교포로 17년간 캐나다에서 보낸 이동엽 대표는 5년 전 서울에 들어와, 이곳 세운을 기반으로 조립 가능한 3D 프린터를 개발해 창업했다고 한다.

스마트폰 가격의 전자 의수를 개발한 이상호 씨 또한 “수십 년 기술 장인의 역사가 있고, 부품 조달할 수 있는 시장과 시제품을 제작할 수 있는 팹랩 시설도 있고… 청년 창업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라며 ‘다시 세운’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서울시는 올 한해 이곳 세운상가에 이러한 청년 메이커와 청년 스타트업의 창업 기반과 성장을 지원하기 위한 거점 공간을 차례로 선보인다.

지난 3월 2일에는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교육, 제작활동을 지원하는 4개 전략기관(서울시립대,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씨즈, 팹랩서울)의 입주공간 2개소가 문을 열었다. 장기간 비어있던 아세아상가 3층에는 청년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공간 ‘창의허브’가, 과거 보일러실이었던 지하 공간에는 제작·창작 활동이 이뤄지는 제작소 ‘팹랩 서울’이 조성되었다.

아세아상가 3층엔 청년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공간 `창의허브`가 조성됐다.ⓒ이현정

아세아상가 3층엔 청년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공간 `창의허브`가 조성됐다.

“사실 기술랩은 전국적으로 많이 있어요. 사회적경제를 지원하는 곳들도 많이 있는데, 그 두 가지가 만나는 경우가 별로 없는 거예요. 사회적경제기업 중에 제조업 기반이 그렇게 많지 않잖아요. 그래서 제조업 쪽으로 많이 지원도 해드려야 할 것 같고, 특히 여기는 저희가 가진 자원만 활용하는 게 아니라, 지역에 계신 장인분들이나 지역의 자원들을 같이 활용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협력해서 가야 될 것 같아요.”

이한솔 씨는 아세아상가 3층 전체공간을 기획하고 서울시와 함께 공간을 운영하는 사단법인 씨즈에서 일하고 있다. 이곳 공간을 통해 실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사회적 경제를 접하지 못했던 메이커들에게 사회적 경제를 알리는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세운상가 지하 과거 보일러실은 개방형 디지털 제작소 `팹랩 서울`로 탈바꿈했다.ⓒ이현정

세운상가 지하 과거 보일러실은 개방형 디지털 제작소 `팹랩 서울`로 탈바꿈했다.

세운상가 지하, 과거 보일러실 모습이 남겨진 제작실은 팹랩 서울에서 운영한다. 팹랩 서울은 2014년 4월 이곳 세운상가 5층 문을 연 개방형 디지털 제작소로, 누구나 아이디어만 있으면 이곳에 와서 본인이 만들고 싶은 것들을 디지털 제작 단계를 통해 구현할 수 있다. 3D프린터, 레이저 컷, 대형 CNC 장비 등을 갖추고 있으며, 매월 있는 정기교육을 받으면 시간당 3,000원이라는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다. 홈페이지(fablab-seoul.org)에서 예약하면 된다.

세운상가엔 서울시립대 시티캠퍼스도 들어선다.ⓒ이현정

세운상가엔 서울시립대 시티캠퍼스도 들어선다.

이곳 세운상가에는 서울시립대 시티캠퍼스도 들어오는데, 이곳 거점공간을 강의실 삼아 도시공학과, 건축학부 등 현장 중심형 학과의 현장교육과 실습이 진행될 예정이다. 또한, 세운 상인, 입주 스타트업,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기술·창업 및 도시재생·인문교양 교육도 진행한다.

보행데크에 조성 중인 `세운 메이커스 큐브`ⓒ이현정

보행데크에 조성 중인 `세운 메이커스 큐브`

현재 3층 보행데크(세운~대림상가 구간) 옆 난간 쪽에는 ‘세운 메이커스 큐브’라는 이름의 29개 창업공간이 조성 중이다. 오는 5월이면, 이곳에 드론개발실, Fab장비개발실, 실험게임개발실, 키트개발실, IoT UX 디자인실, 스마트모빌리티개발실, 스마트의료기기개발실, 메이킹교육실험실 등이 만들어져 실제 스타트업이 입주해 창작, 개발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세운전자박물관, 테크스토어, 테크북카페 등 시민메이커를 위한 체험 및 관람을 위한 공간도 조성된다. ‘세운 메이커스 큐브’ 입주 기업은 3월 중 모집할 예정이라고 한다.

8월에는 시민문화시설과 공중보행교 조성 공사가 완료된다. 옛 초록띠공원 자리에는 세운 광장(지상부), 다목적홀과 문화재전시관(지하부)이 선보이게 되는데, 이곳에선 메이커페스티벌 등 제조업 관련 시민 행사가 열리게 된다. 문화재 전시관에는 공사 중 발견된 중부관아터와 유적을 관람할 수 있는데, 이는 한양도성 내 최초의 현지 보존방식으로 조성된 것이다.

세운상가 옥상(8층)에는 종묘, 남산 등 도심 일대를 조망하는 전망대와 시민들이 쉬어갈 수 있는 쉼터가 만들어진다. 또한, 청계천 복원 당시 철거한 3층 높이 공중 보행교도 다시 연결해 선보일 예정이다. 2019년까지 삼풍상가에서 진양상가를 잇는 보행교도 조성할 것이라는데, 2019년이면 종묘에서 남산까지 이어지는 남북 보행축이 만들어져 서울의 걷기 좋은 길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다시 세운 ‘메이커시티(Maker City) 세운’

지난 3월 2일, 세운상가 8층 옥상에서는 이와 같은 ‘다시 세운 프로젝트’ 단계별 추진 계획과 함께, 10년 넘게 지체돼온 ‘세운 4구역 국제지명현상설계’ 공모 최종 당선작도 선보였다.

세운 4구역은 세계문화유산 종묘 등 인접한 역사경관 훼손이 우려된다는 의견과 수익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층으로 지어져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하며 사업이 지연되고 이로 인해 주민 갈등도 심화되었던 곳이다.

국제지명현상설계 공모를 통해 `메이커 도시`로 거듭날 세운4구역ⓒ이현정

국제지명현상설계 공모를 통해 `메이커 도시`로 거듭날 세운4구역

공모당선작은 문화재위원회에서 허용해준 높이보다 8.3m 줄여 설계해, 2023년 완공되면 수목에 가려져서 전혀 보이지 않게 된다는 점이 특히 눈에 띈다. 또한, 1748~1948년대 옛길의 구조가 남아있는 골목구조를 그대로 이용하고, 보존 가치가 있는 역사건물 8채를 남긴 점, 건물 높낮이를 조절해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한 것과, 옥상정원 등을 조성해 종묘부터 남산까지 녹지 축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한 점도 인상적이었다.

세운상가 일대는 이렇게 건물도 사람도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지역 기반 인프라를 기반으로 청년 메이커들이 자유롭게 창작 활동을 하며 성장하는 ‘메이커 도시’로 거듭나게 될 전망이다.

누군가는 낡고 오래된 것은 당연히 없애야 할 것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지난 시절, 낡은 시설을 재빠르게 허물고 최첨단 건물을 세운 것처럼….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빌딩 숲, 아파트 숲에 살아가는 우리는 다시 이웃 간의 정을 나누던 골목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옛 물건들을 수집하곤 한다.

이젠 막무가내식 개발 대신, 더 이상 이웃이 떠나지 않는,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도시재생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아날로그 세대의 기술과 기반이 스마트 세대들의 상상을 실현하는 세운의 현재의 실험이 더욱 흥미롭게 느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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