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을 위한 지붕 없는 복지관 ‘락희거리’

시민기자 최용수

Visit1,728 Date2017.03.02 16:47

탑골공원 북문과 낙원상가 사이 어르신친화거리 `락희거리` 이정표 ⓒ최용수

탑골공원 북문과 낙원상가 사이 어르신친화거리 `락희거리` 이정표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황혼아 내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 그리고 내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게 /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누구나 숙명처럼 맞이해야 할 황혼을 노래한 이육사의 시 <황혼>의 일부이다. 황혼을 즐겁고 기쁘고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특화 거리가 서울에 생겼다.

입춘이 지났는데 여전히 냉기가 옷소매를 파고드는 아침이다. 1만원을 지갑에 챙겨 넣고 친구를 만나러 집을 나선 K어르신(화곡동, 75세), 출근시간을 피했으니 지하철 무임승차에도 미안함이 덜하다.

드디어 종로3가역, 친구들을 만나서 5번 출구를 나왔다. 느린 걸음으로 5분 거리, 악기상가로 유명한 낙원상가 4층의 ‘실버영화관’에 도착한다.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옛 허리우드극장으로, 서울시가 후원하는 어르신 전용영화관이다.

어르신 전용극장인 `실버극장`과 `명랑극장` 모습 ⓒ최용수

어르신 전용극장인 `실버영화관`과 `낭만극장` 모습

기자도 표를 사서 어르신들과 함께 극장으로 들어갔다. 첫 회 상영인데도 빈자리가 드물다. 오늘 영화는 데이빗 니븐과 킴 헌터 주연의 <천국으로 가는 계단(A Matter Of Life And Death, 1946)>이다. 젊을 때 감명 받았던 영화를 황혼기에 다시 보니 느낌이 다르다고 했다. 왜 ‘죽기 전에 꼭 봐야 하는 영화 목록’에 이름을 올렸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55세 이상이면 365일 2,000원으로 관람할 수 있는 ‘실버영화관’ 곁에는 ‘낭만극장’이 있다. 매주 월~토요일까지 50세 이상이면 누구나 3,000원으로 관람이 가능하다. 각각 270석 규모로 60~70년대 인기 영화가 주로 상영된다.

극장 관계자는 “영화에 따라 관객 수가 달라지는데. 인기 있는 영화가 상영되는 날은 서서 봐야할 정도로 사람이 몰린다”며 하루 평균 500~600명이 찾는다고 귀띔했다.

극장 로비 한 켠에는 스마트폰 사진을 유화그림으로 바꿔주는 ‘미디어아트’가 있다. 디지털 유화시스템으로는 세계 최초라 한다. “옛 사진을 복원하거나 영정사진을 준비하려는 어르신들이 많이 찾는다”며 김재수 대표는 “특히 영정사진은 어르신들이 직접 보며 마음에 드는 사진을 만들 수 있어서 무척 좋아한다”고 말했다.

스마트폰 사진을 유화그림으로 바꿔주는 `미디어아트` 내부 ⓒ최용수

스마트폰 사진을 유화그림으로 바꿔주는 `미디어아트` 내부

영화가 끝나고 계단을 내려오니 60년 전통의 국밥전문집인 ‘송해의 집’이 나타난다. 구수한 국밥냄새가 미각을 자극했다. 커다란 통나무를 잘라 만든 탁자에서 삼삼오오 식사하는 어르신들로 식당 안이 북적인다. “우리가 국민MC 송해 선생의 단골집인지 아닌지 알 필요는 없지. 값싸고 맛있으면 최고여” 국밥에다 소주 한잔 곁들이던 어르신들의 대화이다. 어제 여기서 국밥을 먹었다는 K어르신 일행은 다른 곳에서 점심을 할 작정이다.

60년 전통 2,000원 국밥전문집 `송해의 집`ⓒ최용수

60년 전통 2,000원 국밥전문집 `송해의 집`

‘송해의 집’ 오른쪽 모퉁이를 끼고 도니 노후화된 외관의 골목길이 이어진다. 큼직한 글씨의 간판들이 눈에 들어온다. 작년 11월 서울시에서 ‘노인친화거리(Elderly Friendly Street)’로 조성한 ‘락희(樂喜)거리’의 시작점이다.

이곳에서 탑골공원 북문에 이르는 약 100여 미터 구간으로, 어르신들의 신체적·정서적 특성을 고려한 디자인으로 새 단장한 곳이다. ①상냥한 가게(11개소) ②어르신 우선 화장실(1개) ③어르신 이정표(2개) ④지팡이거치대(40개) ⑤심장 응급소(1개) ⑥이심전심 매뉴얼(11개) ⑦큰글자 메뉴판(25개) 등 ‘락희7’이란 7개 디자인이 접목되었다. 어르신들의 기호를 효과적으로 반영한 ‘어르신특화거리’이다.

어르신들을 위한 가게 간판은 글씨를 1.5배 이상 크게 만들었다.ⓒ최용수

어르신들을 위한 가게 간판은 글씨를 1.5배 이상 크게 만들었다.

일행은 ‘야외 DJ 박스’가 눈길을 끄는 식당 ‘추억더하기’로 들어갔다. 영화에서나 볼법한 60년대 학생 교복을 입은 어르신이 안내를 한다. 식탁 위에 펼쳐진 큰 글씨 메뉴판이 인상적이다. 시력이 좋지 않은 어르신들도 돋보기를 꺼내거나 남에게 부탁하지 않고도 주문이 가능하다. ‘추억의 도시락’과 잔치국수가 3,000원이다. K어르신은 학창시절 추억이 담긴 알루미늄 도시락을 주문하고 흘러간 노래 최희준의 ‘하숙생’을 DJ에게 신청했다. 신청곡이 음반을 타니 하숙하던 시절이 떠오른다고 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흘러간 추억의 노래를 마음껏 신청해 감상할 수 있는 식당. ⓒ최용수

흘러간 추억의 노래를 마음껏 신청해 감상할 수 있는 식당.

도시락이 나왔다. 흰 쌀밥과 계란 후라이, 소시지, 멸치조림 등 다섯 가지 반찬이 담긴 누런 도시락에 학창시절의 추억까지 버무리니 특별한 밥맛이다. 당뇨 있는 어르신을 위한 혈당조절용 현미밥도 제공되고, 수시 약을 드셔야 하는 어르신들에게는 무료 생수도 서비스 된다. 식탁의 한 모서리에는 ‘지팡이 거치대’가 설치되어 있는 등 세심함이 돋보인다.

어르신을 위한 식당 `추억더하기`. 어르신들에겐 락희거리만큼 마음 편한 곳이 없다고 한다.ⓒ최용수

어르신을 위한 식당 `추억더하기`. 어르신들에겐 락희거리만큼 마음 편한 곳이 없다고 한다.

“어머니가 싸 주시던 도시락 맛이 나네요. 더구나 젊은이들 눈치 보지 않고 차도 마시며 노래도 신청할 수 있어 참 좋아요”라며 이정자(77세, 은평구) 어르신이 커피 한잔을 기자에게 건넨다.

락희거리 중간쯤에는 ‘스타이발관’이 있다. 빨강·파랑의 이발관 표시등이 빙글빙글 손님을 부른다. 이발 3,500원, 염색 5,000원이란 가격표가 보이고, 입구에는 ‘어르신 우선 화장실’이란 팻말이 걸음을 멈추게 했다. 안으로 들어가 ‘어르신 우선 화장실’을 둘러보았다. 실뇨·실변을 하는 노인들이 뒤처리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변기일체형 세면대와 낙상방지를 위한 ‘ㄹ’자형 안전 손잡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어르신우선화장실 입구(좌), 식탁 모서리에 설치된 지팡이 거치대(우) ⓒ 최용수

어르신 우선 화장실 입구(좌), 식탁 모서리에 설치된 지팡이 거치대(우)

이 외에도 락희거리에는 할머니들이 화장을 할 수 있도록 화장품과 미용도구들을 구비해 놓은 카페,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하모니카 합주를 하는 곳, 자동심장충격기 설치 공간 등 락희거리는 어르신들의 ‘지붕 없는 복지관’ 그 자체였다.

어느새 락희거리의 단골손님이 되었다는 K어르신은 “경로당도 다녀보고 복지관도 갔었는데 마음 편하게 하루를 보내기에는 여기가 제일이야”라며 아직 홍보가 많이 부족한 것 같다고 했다.

자식 공부시키려고 허리띠를 졸라맸고, 이 땅에서 보릿고개를 몰아낸 우리의 어르신들, 마음껏 즐겁고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더 많은 ‘락희거리’로 보답해야 할 차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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