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미제 사건의 범인을 알고 있어요"

최경

발행일 2017.02.10. 16:03

수정일 2017.02.10. 16:03

조회 1,210

눈쌓인 남산ⓒ연합뉴스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57) 불발로 끝난 추억 2 - 이상한 결말

방송을 제작하는 사무실엔 하루 종일 전화가 끊이지 않는다. 전화를 걸어오는 시청자들은 각양각색이다. 정말 중요한 제보전화가 오기도 하고, 마치 상담원에게 하듯 자신의 처지를 길게 하소연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매일 같은 시간이 전화를 걸어 똑같은 질문을 하는 알람시계 같은 이도 있고, 술 한 잔 걸치고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으며 화풀이하는 못 말리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전화를 많이 받다 보면, 직감적으로 ‘이거다’ 싶거나, 궁금증이 솟구치는 제보들이 걸러진다. 좋은 징조로 시작한 제보는 결말도 후련하게 잘 끝날 확률이 높다. 물론 확률 상 그렇다는 것이지,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한번은 한 중년여성이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는데 그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제가... 이 전화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오랫동안 망설이다 용기를 냈어요. 저까지 위험해질까봐서요. 사실은 제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을 알고 있어요... 너무 무서워요.”

화성 연쇄살인사건이라고 하면, 영화로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대표적인 미제 사건이 아닌가. 처음엔 여성의 말이 긴가 민가 했다.

“그 범인을 어떻게 알게 되셨는데요? 혹시 친척이나 지인인가요?”
“음... 그게... 이웃집에 사는 남자예요. 구체적인 건 전화로 말씀드리기가 좀...”

여성은 이웃집 남자가 오래된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고 현재 평범한 사람들 속에 섞여들어 철저하게 자신을 숨긴 채 살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이웃집 남자가 범인이라는 것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됐는데 그 구체적인 증거도 있다고 말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영구미제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선 제보여성과 만날 약속을 했다. 그녀는 방송사 안에서 만나는 게 가장 안전할 것 같다면서 직접 찾아오겠다고 했고,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중요한 제보자인 만큼 인터뷰할 장소도 급히 물색해 놓고 카메라도 두 대를 세팅한 채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조짐이 어쩐지 좋았고 우리는 멋진 결말을 상상하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었다.

“근데 진짜면 어떻게 되는 거죠? 우리가 미제사건 하나 제대로 해결하는 건가요?”
“아무튼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게 입단속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신중하게 움직여야 진범을 잡지요.”
“연쇄살인범인데 우리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경찰에 먼저 알려야겠죠?”

약속시간이 되자, 그녀가 방송사 로비에 나타났다. 몹시 불안해하며 주위를 경계하는 그녀를 안심시키며 우리는 한 회의실에서 모여앉아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우선 이웃집 남자가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됐으며 갖고 있다는 증거가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증거는 제 안전이 100% 보장된다는 확신이 들면 말씀드릴게요.”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증거도 없이 우리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지 않은가.

“틀림없어요. 제가 몇 번이나 확인했거든요. 그 사람이 저도 해치려고 했어요. 아무래도 제가 뭔가 알고 있다고 의심하는 것 같아요. 시간이 없어요. 빨리 잡지 않으면 제가 죽을지도 몰라요. 그 사람은 연쇄살인범이거든요...”

뭔가 자꾸 엇나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서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제작진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먼 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대체 이 제보여성은 무엇을 갖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녀에게 이웃집 남자가 연쇄살인범이라고 확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재차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큰 결심을 한 듯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조용하게 말했다.

“이건 얘기 안하려고 했는데... 대구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도 그 남자가 범인이에요.”

제작진 중 한 사람이 카메라를 접는 소리가 들렸고, 한 사람은 취재수첩을 덮으며 급한 약속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보겠다며 인터뷰룸을 빠져나갔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제작진들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손에 쥐고 있다는 증거를 공개할 때가 됐다고 판단하면 그 때 다시 만나자고 한 뒤에도 그녀는 한참동안 이웃집 남자에 대한 의심을 돌림노래처럼 반복하다 돌아갔다. 속된 말로 영혼이 탈탈 털렸던 그날, 깨달은 것이 있다면 ‘처음이 좋다고 끝이 모두 좋은 것은 결코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물론 그녀에게선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화성연쇄살인사건도, 개구리소년 의문사사건도 여전히 미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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