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끝자락, 문묘 노거수 품에 안기다

시민기자 김종성

발행일 2016.11.16. 16:08

수정일 2016.11.16.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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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당 앞뜰,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오게 하는 은행나무 ⓒ김종성

명륜당 앞뜰,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오게 하는 은행나무

가을이 깊게 익어가는 11월 이맘때쯤, 굳이 멀리가지 않아도 도시에서 가을의 색과 분위기를 충만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학교 안에 있는 ‘문묘’다.

문묘(文廟)는 유교를 집대성한 공자(孔子)와 여러 성현들의 위패(位牌, 죽은 사람의 이름과 죽은 날짜를 적은 나무패로 죽은 사람의 혼을 대신한다)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조선초기인 태조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1년(선조 34)에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육시설인 ‘명륜당’과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대성전’ 등으로 이뤄져 있다.

무엇보다 이곳에선 수령 100년 이상의 크고 오래된 노거수(老巨樹) 나무들을 만날 수 있어 왠지 가을이 오면 더욱 그리워진다. 성균관 문묘엔 은행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측백나무, 단풍나무 등이 살고 있다. 모두 수백 살 먹은 고목(古木)이고, 크고 우람한 거목(巨木)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늙고 굽은 데다 외과수술까지 받아서 그런지 돌아가신 내 할아버지, 할머니를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대부분 나무는 산이나 숲속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지만 문묘의 나무는 적당한 거리로 떨어져 있는 독거나무다. 노거수 나무를 우러러 보고 있던 기자에게 지나가던 관리인이 문묘에 사는 노거수 나무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성균관 문묘의 수문장,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김종성

성균관 문묘의 수문장,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문묘에 들어서면 나오는 ‘명륜당’은 성균관 유생들의 공부방이었다. 명륜당 앞뜰에는 장대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살고 있다. 무성한 가지와 잎으로 눈부신 노란 그늘을 드리워 누구나 탄성을 터트리게 만든다. 문묘와 역사를 함께 한 수문장 나무로 천연기념물이기도 하다.

거대한 은행나무가 이곳을 지키는 데는 은행나무와 공자와의 깊은 인연 때문이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비롯해, 예로부터 공자를 모시는 문묘에는 은행나무를 널리 심었다. 성균관대학의 상징 역시 은행잎이다. 유생들이 공부하는 명륜당에 은행나무를 심고 성균관의 상징이자 학문의 표상으로 삼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은행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것은 모두 열아홉 그루로 전통의 인기 수목 소나무를 2위로 제칠 정도로 대접받는 나무다. 천 년을 산다는 은행나무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팽나무와 함께 4대 장수나무다. 그 가운데 제일의 장수목은 은행나무는 ‘늙음은 쇠퇴가 아닌 완성'이란 명언을 몸소 보여준다.

고목 은행나무에서 희귀하게 볼 수 있다는 유주. 마치 종유석처럼 아래로 자란 줄기가 흥미롭다. ⓒ김종성

고목 은행나무에서 희귀하게 볼 수 있다는 유주. 마치 종유석처럼 아래로 자란 줄기가 흥미롭다.

문묘엔 모두 네 그루의 노거수 은행나무가 사는데 신기하게 모두 수나무다. 덕택에 이맘때 은행나무 열매에서 나는 지독한 냄새가 나진 않는다. 천연기념물 은행나무 가지에선 마치 종유석처럼 길게 밑으로 자란 유주(乳柱, 젖기둥)를 볼 수 있는 점도 흥미롭다. 유주는 오래된 은행나무 가지에서 땅을 향해 아래쪽으로 자라는 일종의 기형돌기라고 한다. 줄기에 상처를 입었을 경우 자가 치유의 방법으로 나무 진액이 흘러나와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다.

문묘 대성전 앞뜰에도 노거수 나무들이 산다 ⓒ김종성

문묘 대성전 앞뜰에도 노거수 나무들이 산다

명륜당 건너편 대성전으로 들어서면 둔중한 덩치의 노거수 느티나무가 맨 먼저 여행자를 맞는다. 시골 마을 어귀마다 정자마냥 자리하고 있었던 친근한 나무다. 이 나무 앞에서 동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서 ‘영목(靈木)’ 혹은 ‘신목(神木)’이라 추앙 받기도 한다. 그래서 봄에 느티나무에 싹이 풍성하게 잘 트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생각했단다.

몸의 반 이상을 수술 받고도 꽃을 피우는 놀라운 문묘의 느티나무 ⓒ김종성

몸의 반 이상을 수술 받고도 꽃을 피우는 놀라운 문묘의 느티나무

한국의 4대 장수나무 중 은행나무와 회화나무는 중국이 원산지고, 느티나무와 팽나무는 우리의 자생 수종이다. 문묘의 느티나무가 놀라운 건, 노화로 인해 몸의 반 이상 외과수술을 받았는데도 주황색으로 물든 단풍잎을 피워내고 있었다. 아직 끄떡없다는 듯 주먹 진 모양의 뿌리들이 땅을 굳세게 쥐고 있다. 공기와 물과 햇볕을 양분으로 사는 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에 경탄이 나왔다. 은행나무, 소나무에 이어 다음으로 많은 열세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대성전 앞뜰에 서 있는 독야청청 소나무 ⓒ김종성

대성전 앞뜰에 서 있는 독야청청 소나무

독야청청의 대명사 소나무도 빠질 수 없다. 철제 지지대에 기대 선 모습이 허리가 굽어 지팡이를 쥔 영락없는 노인의 모습이지만, 높다란 가지에서 자라나는 솔잎은 푸르기만 했다. 소나무는 햇볕 없이는 못사는 대표적인 양지식물이다. 대성전 앞뜰이 햇볕이 잘 들고 비가 많이 와도 물이 잘 빠지는 명당이라 소나무가 이렇게 오래 살 수 있다고 한다. 애국가에 나오는가 하면 국보1호인 숭례문, 보물1호인 흥인지문은 물론 현존 최고의 목조건축물인 부석사 무량수전도 소나무로 지을 정도로 한민족과 친한 겨레의 나무이기도 하다.

가까이에 같은 상록수인 측백나무와 잣나무가 이웃처럼 살고 있다. 세로로 갈라진 수피가 독특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측백나무는 특이한 성향이 있단다. 모든 나무들이 햇빛을 좇아 동쪽으로 향하는 데 반해, 이 나무만이 서쪽으로 향한다고. 그래서 나무이름 앞에 ‘기울다’는 뜻의 측(側)자가 들어갔다니 재밌다. 고소하고 영양가 풍부한 잣 열매가 열리는 잣나무도 느티나무처럼 우리나라 자생종으로 영명도 ‘Korean Pine(한국 소나무)’다.

하늘을 향해 자유롭게 뻗어나간 수형이 아름다운 회화나무 ⓒ김종성

하늘을 향해 자유롭게 뻗어나간 수형이 아름다운 회화나무

은행나무 다음 가는 장수나무이자 궁궐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회화나무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와 중국 유교문화를 상징하는 나무다. 하늘을 향해 자유분방하게 뻗어나가면서도 수형이 아름답고 품격이 느껴져서인지 학자나무로 통한다. 그래서 예부터 고결한 선비의 집이나 서원, 절간, 대궐 같은 곳에만 심을 수 있었다고. 영문명도 같은 뜻인 ‘스칼라 트리(Scholar Tree)’다. 회화나무 앞에 가만히 서있다 보면 반듯하고 인자한 할아버지가 덕담을 들려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성균관 문묘엔 정정한 노거수 나무들이 대부분이지만 뼈대만 남아 죽은 고사목들도 그대로 남아있다. 어느 고사목은 번개를 맞았는지 땅에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 서서 죽은 모습이 성불한 후 열반에 든 스님 같고, 나무 미이라를 보는 듯하다.

오랜 세월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세월을, 세상을 견뎌온 노거수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경외심마저 든다. 가을의 끝자락, 문묘를 찾아 오랜 거목들을 말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성균관 문묘는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로 나와 성균관 대학교 입구까지 도보 10분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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