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물로 먹을 갈아 글씨를 쓰는 집, 간송옛집
발행일 2016.10.25. 17:24
‘문화독립투사’로 불리는 간송 전형필 선생이 지켜낸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 전시(展示)가 봄과 가을로 약 10여 일 간 열릴 때면 성북동 간송미술관 앞엔 긴 줄이 성북초등학교를 지나 대로변까지 생기곤 했었다. 그 긴 줄에 합류해 기다림 끝에 전시 장소에서 만나던 국보와 보물들의 감동은 긴 기다림의 불편함을 상쇄시키기에 충분했다.
2014년부터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간송문화전이 상설로 열리기 전까지 국보급 문화재들을 만나기 위해선 통과의례처럼 ‘긴 기다림과 설렘’을 동반한 그 같은 일들이 일어나곤 했다.
주민들과 함께 했던 간송옛집의 지난 1년을 담아
지난 10월 21일 오후 5시, 개관 1주년 기념행사 소식에 도봉구 방학동 ‘간송 전형필가옥’을 찾았다. 늘 그랬듯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마당엔 사람들로 가득했다. 깔끔하게 단장된 한옥엔 불이 밝혀지고 대청과 누마루엔 청사초롱도 걸렸다.
마당 가장자리로는 사진 속 간송 선생의 모습이 가득했고 일제강점기 우리의 민족문화유산이 이국땅을 떠도는 비극을 막기 위해 사재를 들여 적극적으로 매입한 훈민정음 해례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문병, 추사 김정희의 글씨,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신윤복의 그림들, 국보급 고려청자와 불상 등 많은 국보급 문화재들이 사진 속에 담겨 있었다.
간송가옥 안에서는 간송 전형필 선생과 그가 지켜낸 문화재 관련 영상이 상영 중이었고, 간송가의 종부이자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3호인 김은영 매듭장의 품격 있는 매듭 작품 전시가 이뤄지고 있었다.
바깥마당엔 간송가옥이 지역 주민들에게 열린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으며 1년을 보낸 결과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탁본과 다도, 한지와 비즈공예, 북아트 등 ‘간송서당’에서 진행된 아이들의 작품과 고택의 앞뜰과 뒤뜰에서 진행된 야생화 가꾸기와 압화판 만들기, 세밀화 그리기, 꽃누리미 수업, 주머니 만들기와 상자텃밭 가꾸기, 전통놀이와 요리대회 등 ‘간송의 뜨락’에 참여한 마을 아이들과 마을교사들의 작품들이 한 옥 담장을 따라 올망졸망 전시돼 소소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또한 마을의 수제(手製) 달인들이 만든 멋스런 공예작품들도 전시되고 있었다. 간송 전형필가옥 안팎을 돌아보니 이곳이 지난 1년 간 주민들에게 어떤 공간이었는지가 가늠됐다.
그리 크지 않은 간송가옥을 거의 둘러보았을 즈음, 1주년 기념식이 시작됐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는 오후 5시였다. 기념식의 시작은 식상하지 않아 인상적이었다.
식전 행사로 간송 전형필선생을 주제로 한 상황극이 바깥마당과 안마당에서 차례대로 진행돼, 참석한 이들이 자연스레 간송 전형필 선생과 그가 지켜 낸 국보급 문화재 그리고 방학동 간송가옥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했다.
이 공간을 처음 발견하고 의미심장한 장소임을 단박에 알아보고 국가등록문화재 지정과 복원에 각별한 애정을 보인 이동진 도봉구청장 역시 “주민들은 물론 지방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보기 위해 방문하고 지역의 아이들의 교육장소로도 활용되는 것은 보며 ‘참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이곳이 도봉구에 있다는 것에 자긍심을 갖게 됩니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또한 이곳이 주민들에게 열린 문화공간으로 지역에서 당당히 자리잡기까지 홍보와 프로그램 운영뿐 아니라 고택의 청결과 주변의 조경 등 고택 안팎을 정갈하고 멋스럽게 가꾸고 살핀 이미실 간송옛집지킴이대표와 15명의 주민지킴이봉사단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주민지킴이봉사단은 이곳에 마련된 작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며 고택을 방문하는 탐방객을 맞아 안내를 하거나 고택 주변의 화단을 꾸미고 가꾸고, 고택 안팎을 늘 청결하게 청소하는 일들을 맡고 있다. 이들의 마음 씀 때문에 간송옛집은 늘 청결하고 품격을 갖춘 공간으로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듯했다. 이곳을 다녀간 방문객들은 월평균 2,300여 명을 웃돈다고 한다.
간송옛집의 또 하나의 이름, 맑은 물로 먹을 갈아서 글씨를 쓰는 집 ‘옥정연재’
1주년 행사에 참여한 간송 C&D대표이자 간송가의 종부 김은영 선생은 “그 옛날 간송 선생과 가족들이 제사를 지내거나 일을 보시기 위해 성북동에서 아침에 출발하면 해질녘에나 이곳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묶으시고 다음날 창동역의 기차를 타실 때면 기차 시간에 맞추기 위해 논과 밭을 가족들이 모두 뛰었다고 해요. 이 일대가 전부 논과 밭이었거든요”라는 일화를 소개하며 “간송 선생의 손길이 스며있어 그 동안 가족들이 이 공간을 관리해 왔지만 이젠 도봉구와 주민들이 잘 관리해, 서울시민들의 열린 문화공간이 된 것 같아 정말 좋습니다. 이곳이 간송선생의 문화보급, 문화지킴이 정신을 미래세대로 잇는 장소로 거듭나길 바랍니다”라고 밝혔다.
이번 개관 1주년 기념행사의 백미는 그 동안 ‘방학동 간송 전형필가옥’이라 불리던 이 한옥의 이름을 후손들이 ‘간송옛집’이라 지어, 훈민정음체로 판각한 현판을 대문에 건 것은 물론, 한옥의 누마루에도 ‘옥정연재’라는 현판을 걸게 된 것이다. ‘옥정연재’는 ‘우물에서 퍼 올린 구슬 같은 맑은 물로 먹을 갈아서 글씨를 쓰는 집’이란 뜻을 품고 있다. ‘옥정연재’는 간송 선생이 휘문고보 2학년에 올라갈 즈음 외삼촌이 서재의 이름으로 지어준 것으로 현판의 글씨는 간송의 삶에 나침반이 됐던 스승 위창 오세창 선생의 친필을 판각해 현판에 새겼다 한다.
실제로 바깥마당엔 새롭게 단장한 우물이 있었다. 땅 속에 묻혀 있던 오래된 우물을 복원공사 때 수습해 놓아, 이번 1주년 기념행사에 맞춰 우물 위로 작은 누각을 세우고 그곳에 ‘옥정’이라는 우물 이름을 달았다. 우물과 누마루 이름이 멋진 연관성을 갖게 된 셈이었다.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진 후 조명이 밝혀진 한옥에선 거문고, 해금, 대금 등 전통악기 소리가 은은하게 울리는 전통음악공연이 펼쳐져 한층 멋스런 한옥의 운치를 느낄 수 있었다.
■ 도봉구 방학동 간송옛집(국가등록문화재 521호)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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