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만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게 된 할머니

최경

Visit430 Date2016.10.21 15:26

꽃ⓒ뉴시스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44)

어느 추운 겨울날 새벽, 파출소에 다급한 신고전화가 걸려왔다. 누군가 자동차 전용도로를 위험하게 걷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이 현장에 출동해보니 정말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 갓길을 위험하게 걷고 있는 한 할머니가 있었다. 승복차림에 털모자까지 쓰고 있어 처음엔 노스님인줄 알았다고 한다. 할머니는 절에 불공드리러 가는 길에 청년들이 차를 태워준다고 해서 올라탔다가 건네는 음료수를 마시고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보니 도로가에 버려져 있었고, 돈이 든 통장과 신분증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경찰은 할머니를 파출소로 데려와 신원조회부터 했다. 하지만 주민등록번호를 말하지 못했고, 지문조회를 해봤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런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자신에겐 주민등록증이 틀림없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자식들이 있긴 하지만 외국에 살고 있어 연락이 안 된다고도 말했다.

할머니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스스로 밝힌 권○○라는 이름과 78세라는 나이, 그리고 고향이 경북 안동이라는 것뿐, 결국 임시로 노인보호시설로 가게 됐지만 담당 구청에서도 시설에서도 신원을 알 수 없어 기초생활 수급대상 신청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대체 할머니는 누구이고 왜 대한민국 행정기록에도 없는 걸까. 그런데 정작 권할머니는 자신에 대한 기록이 아무것도 안 나오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여기는 기색이 없어보였다. 혹시 몰라 치매검사도 해봤지만 인지, 판단능력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내가 매일 절에서 기도하면서 돌계단을 닦아서 지문이 다 닳아서 안 나오는 거예요. 주민등록번호는 그게 잘 안 외워지대요. 그런 건 신경도 안 쓰고 살아서 그런가…”

뭔가 말 못할 속사정이 있는 게 아닐까. 할머니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선 발견당시 입고 있던 승복에서부터 단서를 찾아야 했다.

“내 법명은 보현스님이에요. 스님되기 전엔 행진보살이었지요.“

제작진은 할머니가 가려고 했었다는 사찰로 가서 할머니사진을 보여줬다. 스님은 가끔 오는 분이라며 단번에 알아봤다.

“승복 입고 온 적은 없으신데, 옷을 좋은 걸로 쫙 빼입고 오시곤 했어요. 미국에서 국제변호사 하는 아들이 해준 거라면서… 없이 사는 분이 아닌 것 같았는데… 며칠 머물다가 바람같이 가고 그랬어요.”

스님은 아니었지만 권할머니는 스님처럼 살고 싶었던 걸까? 여전히 할머니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다. 주민등록번호를 기억해내지 못하는 할머니가 혹시 최면을 통하면 기억을 찾지 않을까 싶어 몇 번을 시도했지만 좀처럼 최면에 걸리지 않았다. 긴장을 너무 많이 하고 있어서란다. 과거 기억을 꺼내려하지 않는 의지가 강해보였다. 대체 무엇을 꽁꽁 숨기고 싶은 걸까?

제작진은 할머니의 가족을 찾는 제보방송을 내보냈다. 그러자 할머니를 아는 이들이 연락을 해왔다. 한 곳은 대구에 있는 한 사찰, 그곳에서 할머니는 25년을 밥 짓고 살림을 하는 공양보살로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주지스님이 기초생활수급권자를 만들어주려고 할머니에게 주민등록증을 달라고 하니, 그날로 도망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 뒤론 근처 굿당을 떠돌며 일을 해주며 지낸다는 소문을 간간이 들었다고 했다. 실제로 근처 굿당 사람들도 권할머니를 알고 있었다.

“아들이 있다는 것도 거짓말이에요. 자신을 감추기 위해 항상 거짓말을 하는 그런 분이더라고요. 글도 못 읽어요, 할머니가.”

그러니까 권할머니가 문맹에 무적자라는 것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얕볼까봐 거짓말로 자신을 보호해왔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제보자는 영주의 한 식당 사장님이었다. 같은 안동사람이라는 이유로 인연을 맺은 게 20년째. 처음엔 할머니의 말과 행동이 이상해 뒤를 알아보려 했지만 전혀 알 길이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식당일을 도와주곤 했었다며 안쓰러워했다. 식당 사장님은 제작진 편에 옷가지와 돈을 보내며 언제든 오면 함께 지내자는 영상편지도 남겼다. 제작진이 노인시설에 기거하는 권할머니에게 식당 사장님의 마음을 전달하며 대구 사찰의 주지스님 소식까지 전하자 할머니는 갑자기 눈물을 쏟으며 그동안 꽁꽁 감추어뒀던 속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내가 우리 어머니 원망을 많이 하며 살았어요. 왜 나를 낳았냐고. 어디 가면 첩이 낳은 딸이라고 수군거리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듣기 싫었겠어요…”

권할머니의 어머니는 대가 끊긴 집에 아들을 낳기 위해 후처로 들어갔다가 딸을 낳았는데 바로 권할머니였다고 한다. 후처의 딸이라 출생신고조차 못한 채 자랐고, 학교도 다닐 수 없었다는 것이다. 있어도 없는 존재. 천대와 멸시 속에서 자신의 사연을 꽁꽁 감춘 채 살아야 했던 것이다. 고향을 떠난 할머니가 선택한 곳은 신분증이 필요 없는 깊은 산속이었다.

“철이 들면서 스님공부를 해서 스님의 길로 가야지. 그래서 깨끗하게 살아왔어요. 지금까지”

살아있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할머니느 그렇게 80년 가까이 살아온 것이다. 오래된 소설에서나 나올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런 아픈 사연을 갖고 살아온 노인들이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그래서 한 노인의 일생은 곧 시대의 역사인 것이다.

권할머니는 제작진에게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다고 했다.

“나 주민등록증 만들어줄 수 있어요? 나도 큰소리 한번 치면서 살아보게. 꼭 좀 만들어 주세요.”

권할머니는 80년 만에 처음으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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