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사실'인가?

최경

발행일 2016.09.09. 15:34

수정일 2016.09.09. 17:38

조회 1,552

하늘ⓒ뉴시스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39)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지독한 편견과 오류는 그렇게 강화된다. 나에 대해, 타인에 대해, 그리고 우리 사회의 각종 이슈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을 갖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편이 갈라지고, 오해가 쌓이고 불신이 커지고 극단적인 대결로까지 번지곤 한다. 어떤 일이든 ‘사실’ 확인을 바탕으로 판단하는 것이 순서이지만, 그 ‘사실’이 내가 알고 있는 것, 믿고 싶은 것과 상충되기 시작하면, 사실조차 허위이거나 음모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고 신념이 깨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러고 보면 참 나약한 존재다.

O씨의 집에는 거실과 방마다 물을 채운 페트병이 천장에 매달려 있다. 그리고 무언가 감지를 할 때마다 동영상으로 물병을 촬영하곤 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윗집의 소음 때문에 거의 돌아버릴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엔 쿵쾅거리는 소리로 괴롭히더니 이제는 낮게 지속되는 기계음과 진동을 유발해 자신의 가족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와 진동을 잡아내기 위해 고심 끝에 물병을 천장에 매달아놓고 수시로 동영상으로 증거를 잡아내려 하고 있었다. 이 진동 때문에 열 달 사이 체중이 6Kg이나 줄었고, 잠을 제대로 못자니 입맛도 잃었다는 O씨, 그럴수록 몸의 모든 센서가 진동감지로만 향하고 있었다. 제작진 앞에서 지금도 진동이 온몸에 전해져온다며 씽크대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O씨, 하지만 정작 제작진에게는 아무런 소음이나 진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윗집이 유발한다는 진동과 기계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제 생각엔 치과기공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윗집 남자가 치과에 근무하거든요. 친척 중에 치과의사가 있어서 물어봤더니, 치과기공하면 진동이 엄청나서 밑에 집에 살면 엄청나게 힘들 거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걸 당하고 있는 거예요.”

제작진이 진동을 유발한다는 윗집을 찾아가 확인을 해봤더니 실제로 윗집 남자가 치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하지만 치기공 기계를 집에서 쓸 리가 있냐면서 O씨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있다며 어이없어 했다.

“저희 집에 항상 항의를 하시는데 솔직히 생활소음을 안 낼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85%는 저희 집에서 내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도 무조건 너다. 네가 돌리는 기계 때문에 진동이 울려서 살수가 없다고만 하시니, 저도 오해를 풀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해보고 싶다니까요.”

결국 제작진은 윗집 남자의 동의를 얻어 밤새 O씨의 집과 윗집을 지켜봤다. 새벽 3시가 넘었을 때, 윗집 남자는 작은 방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제작진은 거실에서 카메라를 돌렸다. 그리고 아랫집 O씨와 전화통화를 했다. 역시나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지금 안방에서 진동이 심하게 느껴져요. 거실도 진동이 많아요. 위에서 계속 기계를 돌리고 있으니까요.”

관찰카메라를 통해 본 O씨는 실제로 진동이 느껴지는지 누워 있다가 괴로워하며 거실로 향했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각 윗집엔 어떤 기계도 돌아가지 않고 있었고, 안방은 텅 비어있는 상태였다. O씨가 느끼는 진동의 진원지가 윗집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진 것이다. 제작진은 O씨를 데리고 윗집으로 가 직접 눈으로 확인을 시켜줬지만 믿지 않았다.

“촬영하는 걸 알고 미리 숨겼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분명 진동을 느꼈거든요.”

제작진은 O씨와 전화통화를 하던 시각에 사실은 윗집에 있었고, 아무 기계도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직접 촬영한 영상을 보여주며 확인시켜줬다. O씨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무척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 시간에 저는 분명히 느꼈는데 윗집이 아니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그럼 이제 어디에서 이 원인을 찾아야 하는 건가요?”

아파트 구조상 소음의 진원지를 윗집으로만 한정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하지만 소음피해를 겪는 사람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심리 전문가는 사람들이 보통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를 판단해주는 증거들만 자꾸 찾으려하고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은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O씨의 괴로움의 실체는 윗집 기계음이 아니었다. 사실을 알게 된 뒤, 과민하게 돌아가던 O씨의 진동감지 센서들은 작동을 멈추었을까? 별로 그렇지 못했다. O씨는 다른 진원지를 반드시 찾아낼 거라고 했다. 어쩌면 진동의 진원지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믿는 것이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을 때, 허상은 또 다른 허상을 낳고, 편향은 더 극단으로 향하기 마련이다. 한 사람이 균형감을 가지고 건강한 정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실’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것, 알려고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 사회도 건강해진다.

#최경 #사람기억 #세상풍경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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