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볕 피해 지하도상가 나들이 어때요?
발행일 2016.09.05. 15:46
맹위를 떨치던 불볕더위가 사라진 자리에 가을볕이 내려앉았다. 올 여름 더위는 사람의 체온을 넘나들 정도로 혹독했던 터라 오곡백과를 살찌울 가을볕에도 다시금 놀라게 된다. 도심 거리의 가을볕이 아직 덥게 느껴진다면 문화예술을 품은 을지로 지하도상가를 거닐며 계절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지친 하루의 일상을 달래줄 명소는 뜻밖에도 아주 가까이 있다. 땡볕을 피해 잰걸음에 달려간 곳은 지하도 입구다. 지하철역이 닿는 곳이면 이어지기 마련인 지하도 입구는 도심 사방에 널려있어 접근하기도 쉽다.
서울시청 앞 광장 아래 지하도는 꽤나 넓다. 막 도착한 전철에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바삐 출구를 찾아 저마다 갈 길을 향해 빠져나가기도 하고 더러는 지하도에 남아 다시 어딘가로 발길을 옮기고 있다. 사통팔달, 여러 곳으로 통로가 뚫린 이곳은 서울에서 제일 긴 을지로 지하도상가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시민들의 자유로운 예술작품 전시는 물론 트릭아트 갤러리, 이색계단 체험 등을 접할 수 있는 을지로 지하도상가는 지상 못지않은 문화예술의 거리이다.
1983년 지하철 2호선을 만들면서 조성된 이곳은 서울시청 광장 지하에서 시작해 마지막 구간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까지 약 3km에 이른다. 보통 ‘지하상가’라고 부르고 있지만 지하상가의 정식 명칭은 ‘지하도상가’이다. 점포와 통행을 위한 도로를 같이 포함하기 때문이다. 지하도상가를 걷다보면 개성 강한 독특한 공간을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을지로입구역에 있는 계단이다. 피아노 건반이 선명하게 그려진 이 계단은 밟을 때마다 빛을 발하며 ‘도레미파~’하고 소리를 내 ‘피아노계단’으로 불린다. 무미건조하고 때론 오르기조차 힘겨운 계단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아이디어가 놀랍다. 무심코 계단에 올라섰을 때 들려오는 피아노 음계소리는 도시민들에게는 시원한 청량제가 아닐까?
시청역 방향에는 ‘책꽂이 계단’도 있다. 가까이에 서울도서관이 있음을 예고함과 동시에 도서관의 서고 일부를 옮겨놓은 것 같은 책꽂이를 배경 삼아 시민들은 ‘찰칵’ 사진을 찍어 보기도 한다.
서울시 녹색장난감도서관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 ‘지하도에 웬 장난감도서관?’ 하고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이용객이 많은 편으로 특히 어린 자녀를 둔 시민들에겐 퇴근길에 들를 수 있어 더욱 반가운 곳이기도 하다. 지붕카와 블록, 소꿉놀이 등 유아부터 저학년 아이들이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 3000여 점이 구비된 이곳은 1만 원의 연회비로 다양한 장난감을 이용할 수 있다. 보호자의 신분증과 주민등록등본을 준비해 회원가입 후 장난감을 대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난감도서관의 다양한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다.
시청광장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면 TV와 탈의실, 기저귀교환대, 전자레인지 등을 갖춘 여성휴게실과 수유실이 있어 쉬어가기에 편리하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용할 수 있다. 발길을 옮길수록 문화공간과 휴식공간을 두루 갖춘 지하도상가의 숨은 매력이 끊없이 펼쳐진다.
을지로3가역과 4가역 사이의 ‘정글 테마존’에 이르면 단조롭고 어둡고 칙칙하던 지하도에 대한 이미지가 서서히 바뀐다. 녹색 조명으로 불을 밝힌 이곳은 정글을 느끼며 걸어보는 이색 공간이다. 지하도 양쪽 벽면에 실물처럼 등장하는 사자와 코끼리, 기린 등 동물들과 함께 정글을 누비는 듯 환상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을지로4가역과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사이에는 지하도 벽면 한쪽을 전시공간으로 쓰는 갤러리 ‘을지로 아뜨리愛’가 있다. 청년작가들이 준비한 회화 및 캘리그라피 작품들이 즐비한 이곳은 벽면을 활용해 시민들은 작품감상을 하고 작가는 작품을 알리는 갤러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상업성을 배제한 순수한 작품전시로 시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곳에선 매달 다양한 주제를 다룬 기획전시를 진행하며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시민들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재밌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트릭아트 작품도 전시돼 있다. ‘책 읽는 세종대왕께 호롱불 켜드리기’ 체험에 나선 회사원 김민정 씨는 “주의 깊게 보지 않아 그냥 지나친 적이 많았는데 직접 해보니 신기하고 재미있다”며 그림 속 세종대왕 옆에서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평면 그림이 입체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 착시를 체험할 수 있는 트릭아트는 이 외에도 이순신 장군 팔에 매달려 보기, 구름 위 남산타워에 서보기 등이 마련돼 있다.
커피 향 그윽한 카페, 주머니 가볍게 즐기는 분식집, 발에 맞으면 단돈 만 원에 가져가라는 위트 있는 문구가 적힌 신발가게 등 지상의 시장과 별반 다름없어 보인다.
여주, 삼백초, 맥문동 등 갖가지 약초를 취급하는 약재상에선 따끈한 한방차 시음 코너를 마련해 마치 시골 장터에 온 것처럼 훈훈함을 더한다.
지하도 한쪽에서는 건강검진을 받고 있는 시민들로 붐볐다. 혈압 혈당체크와 건강상담 등 지하도상가 출입구에 인접한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무료건강서비스다.
지하도상가 출입구에서 나와 조금만 걸으면 청계천에 시원하게 발 담글 수 있고 광장·평화·중부시장에 닿을 수 있다는 것도 매력 요소다. 지하도상가가 도심 속 명소로 자리 잡으려면 쾌적한 환경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행히도 지하도에서는 공기의 질을 수시로 자동 측정해서 기준치와 비교한 결과를 모니터로 확인할 수 있어 안심이 됐다. 이 날 모니터에 측정된 지하도 상가의 공기의 질은 이산화탄소와 일산화탄소, 미세먼지 등이 각각 기준치 이하로서 양호하게 나타났다.
지하도상가의 상점들을 잘 살펴보면 지상의 환경과도 보조를 잘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한복점이 형성된 곳엔 가까이 궁이 있음을 암시하고, 의류상점이 즐비한 곳엔 지상에 의류시장이 형성돼 있다는 신호다. 을지로에 인쇄소가 밀집돼 있는 만큼 을지로 지하도 상가엔 명함가게나 기념품 제작 업체가 많았다. 동대문으로 가까워질수록 의류와 스포츠용품점 캠핑용품 취급점 등이 줄지어 나타나더니 이내 ‘동대문스포츠지하쇼핑센터’라는 팻말이 보인다. 이미 이곳을 통틀어 ‘을지로 지하도상가’라고 부르고 있음에도 이 짧은 구역에 또 다른 이름을 붙인 까닭은 아마도 이 구역 나름의 특성을 손님들에게 잘 알리기 위한 방편인 듯 보였다.
의류점을 열고 있는 성기화 씨는 “출퇴근길 젊은 직장인들이 많이 들르는 길목이라 취급상품의 질이나 디자인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하며 “저렴한 가격에 비해 품질 좋은 옷이란 걸 증명해 보이려고 이곳저곳 발품 팔아 마련한 옷들을 손님들이 먼저 알아봐줘 단골도 많이 생겼다”고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땅 속 길을 쉴 새 없이 오가는 부지런한 개미들처럼 을지로 지하도상가는 서울시민들의 또 다른 삶의 공간이었다. 지하도를 터전 삼아 하루하루 삶을 일궈가는 상인들과 쇼핑도 하고 주전부리도 즐기며, 문화체험도 하는 소시민들의 모습을 함께 엿볼 수 있었다.
을지로 지하도상가는 서울시청 광장 지하에서 출발해 한 시간 정도 걸으면 상가의 끝 지점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닿을 수 있다. 휴식과 여유를 선물하는 지하도상가를 거닐며 혹독한 더위에 지친 몸을 추슬러보자. 이제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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