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기역(ㄱ)자' 등이 곧게 펴진 사연

최경

발행일 2016.08.26. 17:00

수정일 2016.08.26. 17:23

조회 2,082

손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37) 종로 ‘기역(ㄱ)자’ 할머니의 소망

몇 년째 종로 거리를 떠도는 한 사람을 둘러싸고 소문이 무성했다. 작년 초의 일이다. 대번에 눈에 띄는 모습 때문에 종로 일대의 상인들 중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몇 년 전부터 매일 봐요. 몸이 옆으로 구부러져서 걸어 다니는 거 보면 안쓰러워요.”
“완전 기역자라니까 기역자. 작년보다 더 옆으로 기울어진 것 같아, 날도 추운데 저러고 놔두면 죽을 것 같아요.”
“이름 물어봐도 안 가르쳐 주고, 병원 가보자 그래도 화만 내고, 누가 좀 도와줬음 좋겠어요.”

매일 종로 거리에 나타난다는 ‘기역자 할머니’는 상반신이 왼쪽으로 심하게 굽어 기역자 모습으로 하루 종일 걸어 다닌다고 했다. 얼마간 기다려보니, 상인들이 가리키는 곳에서 실제로 ‘기역자 할머니’가 보였다. 고개까지 왼쪽으로 심하게 꺾여 있어서 앞이 제대로 보이는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도와주고 싶어 할머니에게 말을 걸어봤지만 돌아온 건 거친 욕설뿐이었다. 심지어 허리띠까지 휘두르면서 제작진은 물론이고 선의로 사람들을 쫓아냈다. 그리고는 노점상에서 튀김 몇 개를 사고는 멀찌감치 떨어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며 먹기 시작했다. 타인이 접근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심한 기역자 할머니지만, 튀김을 판 노점상의 이야기는 좀 달랐다.

“단골이에요. 온지 몇 년 됐지. 근데 꼭 저렇게 다른데 가서 먹어요. 장사 방해될까봐 그러는 것 같아. 돈도 안 받겠다 해도 꼭 줘요. 남 신세지는 걸 싫어하더라고요.”

대체 기역자 할머니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어떤 이는 자식들이 몸과 정신이 온전치 않은 할머니를 갖다 버린 거라고도 했고, 또 어떤 이는 할머니가 집도 재산도 많은 알부자인데다가 몸도 실제로 멀쩡한데 일부러 사람들 동정심을 사 돈을 얻기 위해 그렇게 다니고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모두 소문일 뿐, 할머니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제작진이 며칠 동안 관찰해본 결과, 기역자 할머니는 낮에는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밤이 되면 공원 공중화장실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노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때는 겨울이었고, 몸이 성치 않은 할머니에겐 너무나 위태롭고 위험해 보였다. 관할 구청과 경찰에서도 여러 차례 도움을 주려고 해봤지만 스스로 인적사항을 전혀 밝히지 않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되려 제작진에게 물어볼 정도였다.

“이름이 뭔지 알아내셨어요? 우리가 그 할머니한테 얻어먹은 욕만 해도 배부를 정도라니까요. 가족들에게 연락하려면 인적사항을 알아야 하는데, 절대 입을 안 열어요.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강제할 방법이 없어요.”

제작진은 20일 넘게 기역자 할머니 곁을 계속 따라다녔다. 때론 욕을 먹고, 때론 얻어맞기도 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겨울비가 내리면 옆에서 말없이 우산을 씌워줬고, 심하게 꺾인 고개 때문에 위험하게 길을 건널 때엔 옆에서 눈이 돼 줬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할머니가 제작진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버스정류장 벤치에서였다.

“가까이 와서 앉아 봐요...”

할머니가 제작진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우리는 조금씩 궁금한 것들을 물어봤다. 하지만.

“거리에 내쫓겨 있는 사람이면 땅거지지. 뭘 이름을 묻고 그래요?”
“왜 도움을 안 받으려고 그러세요? 병원도 좀 가보셨으면 좋겠는데...”
“남 도움 받으면 화폐권력하고 휴대폰 독침하고 생명을 바꾸기 때문에 안돼요. 독침 맞으면 허리가 더 구부러져요.”

기역자 할머니가 하는 말은 어딘가 좀 이상했다. 남의 도움을 받으면 독침을 맞게 되고 그렇게 되면 허리가 더 구부러진다니 무슨 의미일까. 그래도 제작진은 끈질기게 설득했고, 마침내 병원 건강검진 한번 받아보는 정도만 해보겠노라는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할머니를 걱정한 모든 이들의 바람대로 병원에 가게 된 기역자 할머니, 그런데 검사를 해보니 몸이 기역자로 심하게 굽은 건, 척추측만증 때문이 아니었다.

“사진 상으로는 35도 정도 척추측만증 소견을 보이는데요. 선천적인 기형이나 이런 건 아닙니다. 이것 때문에 90도 가까이 꺾일 수는 없어요. 다른 정신적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정신과 상담에서 기역자 할머니는 신체 망상을 가지고 있는 조현병 진단을 받았고, 입원치료가 필요한 상태라고 했다. 문제는 할머니의 신원을 파악해야 하는 것. 그런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름과 나이를 말하지 않았던 할머니가 술술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 53년생이에요. 이름은 L이고요. 주민등록번호는...”

경찰의 도움을 받아 제작진은 가족으로 추정되는 한 여성과 연락이 닿았다. 언니라고 밝힌 여성은 소식이 끊긴 동생 L을 20년 넘게 찾아다녔다면서 당장 만나고 싶다고 했다.

“찾다 찾다 하도 안 찾아져서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연락이 오네요. 세상에!”

며칠 뒤 정신과병동에 입원중인 기역자 할머니는 외출을 해 언니를 만나러 갔다. 기다리던 언니는 단박에 동생을 알아봤지만, 동생은 한동안 얼떨떨해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언니가 부모님과 L의 젊을 때 사진들을 보여주자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띄기 시작했다. 기억이 조금씩 떠오르는 것 같았다. L할머니는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한 뒤 친정과 소식을 끊었고, 가정생활이 평탄하지 못해 결국 혼자 떠돌아다니며 몸도 정신도 온전치 못한 상태까지 됐던 것이다. 그렇게 자매의 상봉은 어렵게 이루어졌고, 언니는 다시는 동생의 손을 놓지 않겠다고 했다. 기역자 할머니는 우리를 향해 믿을 수 없는 말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가족 찾아줘서!”

그리고 언니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L할머니의 등은 놀랍게도 곧게 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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