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의 자취 찾아 '서촌' 한바퀴!

시민기자 최용수

발행일 2016.08.11. 16:10

수정일 2016.08.11.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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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기념관

우당기념관

‘서촌(西村)’은 경복궁 서쪽에 있는 마을을 일컫는 별칭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서쪽 사이,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대를 뜻한다. 관광 명소로 유명세를 탄 ‘북촌(北村)’과 달리 서촌 골목은 길을 잃기 일쑤다. 그래도 으리으리한 한옥이 모여 있는 북촌보다 낯이 익은 곳은 서촌 골목이다. 사대부들이 거주했던 북촌이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의 사회 담론(談論)을 주도했다면, 역관이나 의관 등 중인들이 모여 살았던 서촌은 3·1운동의 민족대표, 대한민국임시정부요인, 국내 문화운동 지도자 등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들의 은밀한 거점 마을이었다. 이것이 북촌과 비교되는 서촌만의 특별함이다.

광복의 달 8월, 기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빛나는 자취를 찾아 ‘서촌으로의 도보 여행’을 시작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효자동에서 내렸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직진하면 오른편에 서울농·맹학교가 있다. 거기서 10시 방향 태극기가 펄럭이는 건물이 ‘우당기념관’이다. 서촌으로의 여행은 우당기념관에서 시작된다. 우당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은 1907년 비밀결사 신민회에 참여했고 헤이그 특사 파견 주도, 신흥무관학교 설립기여, 1932년 관동군 사령관 처단을 계획하다 붙잡혀 고문으로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1990년 동승동에서 개관했다가, 2001년 6월 현 위치로 신축하여 이전했다. 전시관은 6개의 코너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회영의 흉상과 낙관, 신흥무관학교 교가, 친필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

지금은 카페로 변한 독립운동가 박동완 집터

지금은 카페로 변한 독립운동가 박동완 집터

우당기념관에서 필운대로를 따라 통인시장 방향으로 내려오면 자하문로9길을 만난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박동완이 3·1운동 당시 살았던 곳이 36번지이다. 박동완(朴東完, 1885~1941)은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여 2년간 옥고를 치른다. 출옥 후에는 기독신보 주필, 신간회 간사, 하와이로 건너 간 뒤에는 국내 민족운동 후원활동을 했다. 그가 살던 집터는 젊은이들이 북적이는 카페 ‘ohoo-cafe’가 차지하고 있다. ‘차를 마시며 재잘 되는 저 친구들은 이 집터의 의미를 알까?’ 카페사장(이충형)에게 스토리를 전해주니 깜짝 놀란다. “우리 카페가 독립운동가가 사시던 집터라니 무척 자랑스럽네요. 이야기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며 땀에 젖은 기자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을 건넨다.

이어 발걸음을 재촉하여 자하문로7길로 들어서 52번지에 이르면 분식집이 나온다.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이 독립운동가 ‘김재문의 하숙 터’이다. 김재문은 1926년 6·10만세운동 당시 ‘통동계’ 학생들이 독립만세시위 때 사용할 격문, ‘조선민중아! 우리의 철천지 원수는 자본제국주의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을 기초한 곳이다. 통동계(通洞系)는 중앙보통고등학교와 중동학교를 일컫는 말이다.

이상의 집

이상의 집

김재문 하숙터에서 몇 걸음 내려오면 18번지에서 ‘이상의 집’을 만난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문학작가 이상(李湘, 1910~1937)이 세 살부터 스물 세 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집터 일부에는 이상과 관련한 도서를 구비한 문화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무료로 개방하니 누구나 자유롭게 열람이 가능하다. 이상은 일제강점기 시인 겸 소설가로 ‘오감도’ ‘날개’ 등을 발표하였고, 1937년 사상불온 혐의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건강악화로 그해 4월 사망했다. 김해경이 본명인 그가 ‘이상’이 된 것은 조선총독부 건축기사 당시 인부들이 ‘리상[李씨]’하며 일본식으로 부른 데서 연유했다니 참 흥미롭다.

김가진 집터

김가진 집터

자하문로7길에서 경복궁역 방향으로 내려오다 우회전 하면 자하문로13번지에서 ‘김가진 집터’를 만난다. 대한제국 고위 관료 출신 애국계몽운동가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이 살던 곳이다. 일본공사, 병조참판, 독립문과 독립공원 조성기여 등 애국계몽운동가로 활동하다 경술국치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고문으로 활약했다. 서울시에서 설치한 작은 표지석이 집터를 지키고 있다. 비에 젖은 무궁화꽃 세 송이를 바치고 잠시 추모의 묵념을 올렸다.

경복궁역 1번 출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7번 출구 바로 앞 사직로 대로변에는 국민대회/한성정부 준비 거점 ‘한성오 집터’가 있다. 3·1운동 발발 직후인 1919년 4월 초순 홍면희·이규갑·한남수·김사국 등은 한성오 집터에 모여 국민대회를 조직하고, ‘한성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 취지서'를 제작한다. 이후 각계의 독립운동세력을 망라한 임시정부 수립을 결의하고, 국민대회에서 한성정부 수립을 선포된다. 한성오 집터에는 표지석이 서 있다.

오화영 집터

오화영 집터

한성오 집터에서 새문안로5가길 ‘종교교회’ 방향으로 이동하면 ‘오화영 사택 터’가 보인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동한 오화영(吳華英, 1880~1960)이 종교교회 목사로 재직하며 살았던 곳이다. 3·1운동 준비과정에서 개성과 원산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여 만세운동의 지방 확산에 기여했고, 1919년 3월 1일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다 붙잡혀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른다. 이후 광주학생독립운동 사건 등으로 2차례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 국가보훈처에서 지정한 현충시설이다.

주시경마당

주시경마당

이외에도 사직로8길에는 1930년대 조선의 ‘얼’을 강조하면서 일제 식민사관의 허구성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등 ‘조선학운동’을 주도한 ‘정인보(鄭寅普, 1893~1950)와 ’조선심(朝鮮心)‘의 발굴과 보급에 힘썼던 문일평(文一平, 1888~1939)의 집터가 있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 세종문화관 뒤편의 당주동 108번지의 ’주시경마당‘에도 가보았다. 국어를 지키고 보급하기 위한 연구와 활동을 통해 일제 침략에 맞섰던 주시경과 헐버트의 기념공원으로, 선생들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올해도 우리는 광복절 노래를 힘차게 부르리라.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중략)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매년 반복되는 의례적인 광복절 기념도 좋지만 올해에는 우리가 잊고 지낸 독립운동가의 자취를 찾아보는 것, 의미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8월에는 가족들과 함께 서촌으로의 테마여행, 권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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