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노선이 구불구불한 이유

정석

발행일 2016.08.09. 16:10

수정일 2016.08.09. 18:09

조회 2,954

노을ⓒ시민작가 라성민

정석 교수의 서울 곁으로 (19) 도시를 움직이는 힘들을 보자

어느 지하철 노선은 왜 마을버스처럼 구불구불 돌아서 갈까? 지하철역들은 왜 이곳에 자리 잡았을까? 저 동네는 지하철역이 아주 촘촘한 데, 우리 동네는 왜 이렇게 듬성듬성 간격이 멀까? 지하철의 노선과 역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도시를 움직이는 힘들을 볼 수 있다. 지난 4.13 총선 때 서울시의 각 당 후보들이 공약으로 내건 지하철역의 개수를 모두 합치면 60개에 이른다고 한다. 지하철역은 이렇게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되기도 한다.

3호선 지하철 노선도를 한번 보자. 고양시 일산 신도시 대화역에서 출발해서 원당을 거쳐서 불광역, 녹번역, 그리고 도심을 지난 다음에 한강을 건너 압구정역, 고속터미널역, 교대역, 양재역, 수서역을 지나 오금역까지 이어진다. 예전에 일산 신도시에 살면서 성남에 있는 경원대학교까지 3호선을 타고 출퇴근을 했던 적이 있다. 걷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출근하는 데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 3호선 노선이 출발역에서 종점역까지를 직선으로 이었다면 구간 거리는 38km 정도였을 텐데 구불구불 돌아가는 현재의 노선거리는 57km다. 약 1.5배 우회하는 셈이다.

지하철 3호선은 왜 이렇게 돌아갈까? 이유가 뭘까? 특히 한강을 건너 압구정역에 도착한 다음에는 남동쪽으로 진행하던 방향을 반대로 틀어 서쪽의 신사역 쪽으로 돈다. 그렇게 잠원, 고속터미널, 교대, 남부터미널역까지 돈 다음에야 다시 원래 방향으로 향한다. 3호선 노선이 지금과 달리 직선구간으로 결정되었다면 훨씬 더 시간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노선만 그런 게 아니다. 지하철역의 밀집도도 지역마다 다르다. 강남구 신논현역 주변 반경 2km 안에는 총 6개 노선의 15개 지하철역이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강남구의 수서역 주변 반경 2km 범위 내에는 총 3개 노선의 7개 역밖에 없다. 왜 이렇게 서로 차이가 날까? 물론 도시의 입지조건과 토지이용 상황 그리고 개발정도나 지가 등의 영향도 있겠지만 지하철역을 유치하고자 하는 정치적 경제적 힘들도 작용했을 것이다.

지난 4.13 총선 때 서울시 강남을 선거구에서 아주 이례적으로 야당 후보였던 전현희 후보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지하철 문제 해결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전 후보는 선거기간 동안에 “지하철 꼭 해내겠습니다”라고 적힌 피켓을 목에 걸고 보금자리 주택건설로 심각한 교통정체를 겪고 있는 세곡사거리와 수서역 구간에서 여러 번 선거운동을 했다. 강남에 사는 유권자들이 야당 후보를 선택하여 당선시킨 데에는 지하철에 대한 불만과 갈망도 작용했을 것이다.

지하철역 이름에도 많은 정치적 힘들이 반영된다. 지하철역에 들어간 대학교 이름도 이런 힘들의 작용 결과로 볼 수 있다. 서울대입구역, 교대역, 동대입구역처럼 처음부터 지하철역 이름에 대학교 명칭이 들어간 역들도 있지만, 청량리역(서울시립대입구역), 미아역(서울사이버대학역), 단대오거리역(신구대학교역), 방배역(백석예술대역), 명동역(정화예술대역)처럼 나중에 병기된 경우도 많다. 서울메트로와 도시철도공사가 지하철 역명병기 유상판매를 시행하면서 대학교명이 들어간 지하철역 이름은 더욱 늘 것이다.

역 이름을 둘러싼 갈등도 많다. 고속철도 역 이름을 ‘천안역’으로 할 것인가, ‘아산역’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지역 간 갈등이 벌어져 결국 ‘천안아산역’으로 결정되었고, 최근에는 ‘오송역’의 이름을 ‘청주오송역’으로 바꿔달라는 청주 시민들의 목소리가 높아간다고 한다.

‘봉은사역’ 명칭을 ‘코엑스역’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의 이면에는 종교간 갈등이 웅크리고 있고, 고속철도 역사로 개통하게 될 ‘KTX수서역’을 ‘강남수서역’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는 강남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강남 사람들의 정서가 배어있다. 어감이 썩 좋지 않다는 이유로 ‘장지역’을 ‘가든파이브역’으로 바꾸자는 요구도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역 이름이 아예 바뀐 경우도 있다. ‘동대문운동장역’은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된 뒤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으로 바뀌었고, ‘성내역’도 ‘잠실나루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성내라는 명칭이 강동구 성내동과 같아 혼돈을 준다는 이유로 변경되었지만 성내역이 과거 잠실시영아파트 시절의 느낌을 주는 것에 대한 주민들의 거부감도 영향을 주었던 게 아닐까 싶다. 잠실의 ‘신천역’도 신촌역과 비슷해 혼동을 준다는 이유로 최근 ‘잠실새내역’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잠실나루역’, ‘잠실역’, ‘잠실새내역’까지 나란히 있는 3개 역에 모두 ‘잠실’이 들어가게 되었다.

지하철의 노선을 결정하는 데에도, 또 지하철역의 위치를 결정하는 데에도, 그리고 지하철역 이름을 짓거나 바꾸는 데에도 모두 어떤 힘들이 작용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예컨대 지역 이기주의든, 정치권력이든, 자본력이든, 종교 간의 갈등이나 힘겨루기든 뭐든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게 된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공평무사하게 결정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이면에는 끊임없이 이런 힘들이 오가며 서로 겨룬다. 단체장이든 국회의원이든 후보로 나서는 사람들은 늘 이런 것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이 되면 또 이런 것을 자신의 치적으로 자랑한다.

지하철을 이용할 때 내 스마트폰에만 눈길을 주거나 꾸벅꾸벅 졸지만 말고 유심히 살펴보자. 지하철을 둘러싼 힘겨루기를 가늠해보아도 흥미로울 것이다. 지하철노선도를 보면 어느 곳의 힘이 자력처럼 강하게 작용하여 곧게 뻗어야 할 노선을 이리저리 구부리고 심지어 뒷걸음치게 했는지 보일 것이다. 영향을 비교적 많이 받은 노선과 덜 받은 노선의 차이까지 발견할 수 있다면 시민으로서의 시야가 훨씬 넓어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지하철역들의 위치와 촘촘함도 비교해보자. 지역의 힘이 어렴풋이 보일 것이다. 지하철역 이름을 둘러싼 줄다리기와 힘겨루기도 읽어보면 좋겠다.

도시는 이렇게 많은 힘들이 서로 겨루고 얽히면서 움직여간다. 도시를 움직이는 힘을 감지해보자. 도시가 훨씬 더 가까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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