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최경
발행일 2016.07.15. 15:13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31) 인생의 점프를 기다립니까?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이 말장난 같은 표현을 나는 가끔 자신감이 넘치거나 열정 하나로 똘똘 뭉친 후배들에게, 혹은 갓 사회로 나온 어린 후배들에게 쓰곤 한다.
새로 팀원을 뽑기 위해 공고를 내면 어김없이 많은 지원자들이 이력서를 보내온다. 이력서가 그 사람의 전부를 이야기해주진 않지만 대략 어떤 프로그램에서 나름대로의 경력을 쌓으며 시간을 보냈는지, 그 궤적을 조금은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몇 명을 선별해 면접을 보면서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해 보곤 한다. 물론 개중에는 면접에 최적화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자신의 가치관을 포장하기도 하고 원래 갖고 있는 성격을 숨기기도 한다. 외모가 좋다고 해서 이 분야의 일을 잘해내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다 아는 프로그램에 몸 담았었다고 해서 실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며, 또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변방에서 경력을 쌓았다 해서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잠재력이 남보다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이력서의 행간을 읽어내고, 짧은 시간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지원자의 시각과 열망과 의지 같은 것뿐이다.
그 역시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것 뿐,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뽑아도 몇 달 안 돼 그만둬 버리거나, 처음 예상과 달리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함께 일할 팀원을 뽑는 과정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경력이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많은 프로그램을 이리저리 짧게 짧게 옮겨 다니는 경우다. 이런 지원자는 속된 말로 ‘모 아니면 도’다. 솔직하게 말하면 ‘도’에 가깝다. 한번은 면접에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기대를 하고 갔는데 배울게 없어서요. 배울 수 있는 곳으로 가느라 그랬어요. 나중에 제가 목표로 하는 프로그램을 하려면 빨리 배워야 하니까요. 그 다음으로 다시 옮긴 건, 배울 만큼 배운 것 같아서예요. 만족이 안 되더라고요.”
이 자신감 넘치고 발칙한 지원자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고작 이것뿐이었다.
“아직 연차가 낮은데 배울게 없었다는 건 타고난 방송천재이거나 천재라 착각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30년 가까이 이 분야에서 일하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천재를 본 적이 없어요. 날 때부터 방송천재인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어느 곳에나 타고난 재능과 놀라운 실력으로 깜짝 놀라게 하는 사람은 있다. 하지만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 역시 각고의 시간과 노력 없이 완성되지 않는다. 몇 년 전,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이 유행을 한 적이 있었다. 어느 분야에서든 1만 시간의 노력을 들이다 보면 최고가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실제로는 같은 1만 시간의 노력을 해도 누구는 ‘최고’가 되고 누구는 ‘보통’이 된다. 왜 일까? 재능이나 운이 그걸 가르는 걸까? 그보다는 1만 시간이라는 양보다 1만 시간의 질이 결정하는 것 같다. 같은 시간 노력을 해도 어떤 사람은 자신이 부족한 부분이 뭔지를 파악하고 무엇이든 흡수하며 배우려고 하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채워가고, 어떤 사람은 자극을 받고 배우려 하기 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것, 잘하는 것만 반복해서 연마한다면 누가 더 최고가 될까? 그 와중에 고작 몇 달 일하고서 이곳에선 더 배울 것이 없고, 그곳에선 배울 만큼 배웠다는 자만이 들어차기 시작하면 ‘보통 이하’가 되는 건 순식간이다. 누구나 잠재력은 있지만, 누구나 최고가 될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잠룡은 ‘어디에나 있지만’, 용은 ‘어디에도 없다’는 말을 내용 없이 자신감과 욕망만 가득한 후배들에게 종종 하게 되는 것이다.
저 사람은 지독한 행운아라서 실력도 없으면서 일이 잘 풀리고, 나는 운이 없어서 실력이 있는데도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운빨’로 된 최고는 금방 무너지게 돼 있다. 그게 인생이다. 그저 ‘인생의 계단에 점프는 없다’고 생각하며 한 계단씩 차곡차곡 오르는데 집중하는 것만이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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