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믿느니 차라리 의리를 믿겠다

최경

발행일 2016.07.01. 15:06

수정일 2016.07.01. 16:07

조회 876

논ⓒ뉴시스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29) 부부로 산다는 것 1편 - 한 실종 노인의 잔인한 결말

단 한순간도 떨어져 산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고, 숨 쉬는 매순간 생각나고, 시도 때도 없이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벌떡이는,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랑노래의 가사가 다 내 얘기 같은 그런 죽고 못살 만큼 뜨겁던 사랑도 유효기간이 있다. 사랑한다는 말을 수백 번 했어도 사랑이 식고, 마음이 돌아서고 나면 철저하게 남남이 되는 게 남녀 간의 사랑이라지 않던가. 자식들을 낳고 살을 맞대며 수십 년 살았던 부부도 갈라서고 나서 남보다 못한 원수가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2년 전, 제작진에게 한 할아버지가 형님을 찾는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대기업에서 30년 넘게 운전기사로 근무하다 퇴직했다는 형님은 윤모 할아버지. 실종 직전, 서울의 한 택시회사에서 기사로 성실하게 일해 왔는데, 월급날을 불과 며칠 앞두고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윤할아버지가 살던 단칸 월세방엔 설거지도 하다 말고 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고, 전단지를 만들어 뿌리면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형님은 8개월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동생은 형님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을 당한 것 같다고 했다. 이상한 점은 할아버지의 아내와 자식들이 적극적으로 찾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동생도 그게 석연치 않다고 했다. 형님이 실종되기 전에 정신병원에 강제입원 당했다가 겨우 나온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형님이 정신병원에서 편지를 써서 친구에게 보냈어요. 강제로 들어왔는데 나 좀 빼내 달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놀라서 찾아갔었죠. 형수가 입원을 시킨 거더라고요. 근데 퇴원이 안 되는 거예요. 결국 소송까지 해서 겨우 나왔는데 그 사이 형님 집도 팔아버렸더라고요. 이혼까지 해주고 빈털터리 돼서 혼자 택시 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이번에 갑자기 사라진 거예요,”

동생은 이번에도 형수와 자식들이 형님을 아무도 모르는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지만, 가족들과 연락을 시도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며 답답해했다. 윤할아버지의 조카는 그가 실종되기 몇 달 전, 전화로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고 털어놓았다.

“내가 혹시 연락이 안 되면 경찰에 즉시 신고해서 나를 찾아야 한다. 아무래도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아. 네 큰어머니가 나를 어떻게 할지도 몰라.”

처음엔 큰아버지가 과민한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종이 길어지고 보니 그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윤할아버지의 동생과 조카는 애를 태우며 이제나저제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정작 실종신고를 접수받은 경찰에서는 이렇다 할 조사나 추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제작진은 당시 윤할아버지의 아들과 아내에게 연락을 하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결국 윤할아버지의 얼굴을 공개하면서 제보를 기다리는 것으로 프로그램을 마무리했었다. 그렇게 2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윤할아버지에 대한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한 야산에서 암매장된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저지른 걸까. 경찰은 윤할아버지를 유인해 살해하고 암매장한 용의자 3명과 이 일을 청부한 윤할아버지의 아내를 긴급체포했다.

동생의 의심대로 이미 한차례 윤할아버지를 강제입원 시켰던 아내가 이 엄청난 일을 꾸민 것이다. 놀랍게도 방송이 나간 뒤, 누군가 윤할아버지의 얼굴을 알아보고 납치돼 살해당했다며 경찰에 제보를 했다고 한다. 수사를 맡은 경찰은 방송을 보면서 제보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해 수사방향을 잡을 수 있었고,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다고 했다. 살해용의자중 한 명은 이미 예전에 할아버지를 강제입원 시킬 당시 아내에게 돈을 받고 그 일을 도와준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윤할아버지의 아내는 그에게 수천만 원을 줄 테니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했고, 끔찍하게 살해한 뒤, 알몸 상태로 야산에 암매장해 버린 것이다.

부부 사이에 대체 얼마나 깊은 골이 있기에 살인청부까지 할 정도가 됐을까. 자식을 낳고, 집을 장만하고, 함께 걱정을 나누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소소한 일상을 함께 하는 것이 부부인데, 그것도 수십 년을 함께 살며 할머니가 된 아내가 어떻게 이렇게 잔인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일까. 후속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내내 의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동생은 형님이 묻혀있던 야산을 찾아가 이제야 찾게 돼서 미안하다며 주저앉아 울었다. 마지막으로 취재진은 검찰로 향하는 윤할아버지의 아내에게 물었다.

“남편은 당신에게 어떤 존재였습니까?”

수갑을 차고 호송되는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안하지 않느냐는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도 젊은 날, 남편을 보며 설레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설렘은 짜증으로 불만으로 욕심으로 변질됐던 것일까.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부부로 사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한 걸까. 부부는 사랑이 아니라 의리로 사는 것이라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사랑을 믿느니 차라리 의리를 믿는 편이 나은 건지도 모르겠다.

(2편에 계속)

#부부 #최경 #사람기억 #세상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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