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들으며 현충원 탐방하니 또 새롭네~

시민기자 방윤희

Visit1,506 Date2016.06.23 14:32

현충원 탐방에 참가하기 위해 참가자들이 쉼터에 모였다

현충원 탐방에 참가하기 위해 참가자들이 쉼터에 모였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현충원을 제대로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국립서울현충원 홈페이지(http://www.snmb.mil.kr)를 통해 ‘해설과 함께하는 현충원 탐방’ 프로그램에 참가 신청을 하였다. 현충원 탐방의 이유는 나라를 위해 숭고한 희생을 하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님들의 묘역을 순례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나라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현충문을 앞을 지나고 있다

가족들이 현충문을 앞을 지나고 있다

6월의 현충원은 신록을 머금은 듯 그 푸르름에 눈이 부셨다. 오후 2시, 종합민원실 옆 쉼터(빨간 우체통 앞)에서 집결한 참가자들은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른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나라사랑의 마음에는 세대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제일먼저 우리가 찾은 곳은 ‘현충탑’이었다. 현충문을 지나자 현충탑이 나왔다. 집례담당 직원의 안내로 흐트러졌던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하며, 현충탑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딛었다. 좀 전까지도 떠들었던 아이들은 어느새 경건한 마음이 되어있었다. 꽃을 준비한 아이들은 헌화대 위에 국화꽃을 올려놓은 뒤 경례를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탐방객 중 남녀 대표 각각 한명이 재단 앞 향로에 세 차례 향을 넣고 분향을 하였다. 세 번을 분향 하는 의미는 천지인(天地人)사상에 의한 것이다.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님들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은 묵념을 하였다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님들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은 묵념을 하였다

그중 첫째가 사람에 대한 감사인데, 17만 명의 안장자와 유공자에 대한 감사이다. 두 번째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선조 분들께 하는 감사이다. 마지막은 하늘과 땅 사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 대한 감사이다. 우리 모두가 조화롭고 평화롭게 살아감에 감사하는 것이다. 분향 후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님들께 경례를 하고, 고개를 가볍게 숙여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은 묵념을 하였다.

참배를 마친 후 탑 내부에 위치한 ‘위패봉안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위배봉안관은 6․ 25전쟁 전사자 중 시신을 찾지 못한 10만 4천여 호국용사들의 위패와, 유해는 찾았으나 이름을 알 수 없는 6천 9백여 무명용사의 영현이 봉안되어 있다. 전쟁이 발발한지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해를 찾지 못했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위패봉안관을 가득 매우고 있는 알록달록한 꽃송이들이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무명용사의 영현이 봉안된 위패봉안관의 설명을 듣고 있다

무명용사의 영현이 봉안된 위패봉안관의 설명을 듣고 있다

꼬마아이가 위패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 것인지, 전쟁의 의미를 알기나 한 것일까? 아이의 아빠는 위패의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아빠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의 모습에서, 나라사랑의 마음은 현충원을 참배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작가도 부모님의 영향으로 나라사랑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싹틀 수 있었다. 부모님은 30여 년 전 현충원에서 첫 만남을 가졌고, 풀숲이 우거진 현충원의 자연 환경과 호국영웅들의 온기 속에서 데이트를 하였다고 한다. 결혼에 골인한 부모님은 현충원으로 우리를 데리고 나들이 길에 오르곤 했었다. 그 덕분에 나라사랑의 마음이 성장한 것이다.

다음은 묘역을 순례하였다.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이었다. 6·25 전쟁의 위기 속에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학도의용군으로 자진 참여하여 용감하게 싸우다 각 전선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중 경상북도 포하지구 전투에서 산화하여 가매장되었다가 발굴된 이름을 알 수 없는 학도의용군 유골 48위를 1964년 4월 이곳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게 되었다. 해설사의 설명으로 그 시절의 긴박했던 전시상황을 잠시 그려보았다. 꽃다운 나이!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지금의 나였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호국 형제의 묘를 참배하고 있다

호국 형제의 묘를 참배하고 있다

다음은 ‘호국 형제의 묘’로 발길을 옮겼다. 30묘역 앞 쪽에 비석 두개가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형 이만우, 동생 이천우 형제의 사연을 담은 묘비이다.

6·25 전쟁 당시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사랑하는 홀어머니를 뒤로한 채 각각 정든 고향집을 떠났던 두 형제가 전사한 지 60년 만에 다시 만나 이곳에 함께 잠들었다. 각각 1사단(故 하사 이만우)과 7사단(故 이등중사 이천우) 소속으로 서울 수복작전에 이어 북진의 선봉에 서서 평양탈환작전 등 주요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무공을 세운 형제는 안타깝게도 이듬해인 1951년 5월 7일 고양지구전투에서 형님이 전사하고, 같은 해 9월 25일 동생마저 19세 꽃다운 나이에 강원도 양구의 백석산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형님은 1960년 5월 이 곳 현충원 묘역에 모셔졌으나, 동생은 당시 긴박했던 전투상황에서 시신이 미처 수습되지 못하였다. 2010년 10월 뒤늦게나마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의해 동생의 유해가 발굴되어, 형님 곁에 안장됨으로써 비로소 함께 형제애를 나누며 영면할 수 있게 되었다.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어머니는 어떤 심정으로 한 평생을 사셨을지, 전쟁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하다. 그 뭉클함에 보답하는 길은 이만우, 이천우 호국 형제의 묘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일 것이다. 오늘 호국 형제의 묘역 앞에 선 우리들은 같지만 다른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자식의 입장에서, 어른들은 부모의 입장에서 두 형제를 추모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마지막 행선지는 전시관이었다. ‘유품전시관’과 ‘사진전시관’을 살펴보았다. 유품전시관에서 호국부자의 유품을 만날 수 있었다. 부자(父子)는 공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장교로 임관 후, 호국의 일념으로 근무하다가 사랑하는 가족을 남기고 순직하여 현충원에 함께 잠들었다. 아버지(故 소령 박명렬)는 1984년 3월 14일 충북청원에서 팀스피리트 훈련에 참가했다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31세의 나이에 순직하였고, 그의 아들(故 대위 박인철)마저도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2007년 7월 20일 전투기 조종사로 야간 요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태안반도 서북쪽 해상으로 추락하여 순직하였다.

흔히들 가업을 잇는다고 하는데, 아버지의 못다 한 뜻을 이루기 위해 공군 조종사가 된 아들의 업적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외에도 유품전시관은 독립운동가실, 자주국방실, 국가유공자실, 유해발굴실 총 4개실로 구성되어 있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분들이 사용했던 유품을 관람하면서 역사 속 선열들의 삶을 만날 수 있다. 사진전시관은 사진과 영상매체를 통하여 민족수난의 역사와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의 애국․애족정신이 담긴 활동상을 보여주며, 국난극복과 항쟁에 대한 역사의 실증적 교훈을 담았다. 현충원은 이밖에도 임시정부요인묘역, 애국지사묘역과 국가유공자묘역 등이 안장되어 있으며, 산책길이 조성되어 호국추모공원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잔디밭에서 휴식을 즐기는 호국공원 현충원

잔디밭에서 휴식을 즐기는 호국공원 현충원

따스한 햇살이 내려쬐는 현충원 탐방을 마치고, 여러 감정이 뒤섞였다. 나라를 위한다는 것, 그로 인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었다.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나라가 예전부터 지금까지 쭉 부국강병하게 이어진 듯 살고 있지만 그곳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과도 맞바꾼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님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우리는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호국보훈의 달에 기억하는 현충원이 아닌, 날마다 호국보훈의 날이기를 바란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나라사랑 실천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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