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이야말로 가장 구하기 힘든 비범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6.06.24. 15:50

수정일 2016.06.27. 08:54

조회 1,217

공원ⓒnews1

홀로 있을 때는 낡은 거문고를 어루만지고 오래된 책을 펼쳐보며 한가롭게 드러누우면 그뿐이다. 잡생각이 떠오르면 집 밖을 나가 산길을 걸으면 그뿐이고 손님이 찾아오면 술을 내와 시를 읊으면 그뿐이다. 흥이 오르면 휘파람을 불며 노래를 부르면 그뿐이다. 배가 고프면 내 밥을 먹으면 그뿐이고 목이 마르면 내 우물의 물을 먹으면 그뿐이다. 춥거나 더우면 내 옷을 입으면 그뿐이고 해가 저물면 내 집에서 쉬면 그뿐이다. 비 내리는 아침, 눈 오는 한낮, 저물녘의 노을, 새벽의 달빛은 이 그윽한 집의 신비로운 운치이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주기 어렵다. 말해준다 한들 사람들은 또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날마다 스스로 즐기다가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 그것이 내 평생의 소망이다. 이와 같이 살다가 마치면 그뿐이리라.

-- 장혼의 <평생지(平生志)>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29 – 마지막 회

몇 해 전 역사에세이 한 권과 그 책을 쓴 저자를 길잡이 삼아 ‘북 트레킹’에 나선 적이 있다. 그동안 역사서와 상상 속에만 있던 ‘한양’을 내 발로 밟아보는 즐거운 경험이었다. 조선의 뒷골목 중에서도 서촌(西村), 몇 해 사이 카페와 음식점이 가득 들어차 ‘핫 플레이스’가 된 동네가 우리의 주요 답사지였다.

그곳에는 역사가 빼곡했다. 눈 밝은 길잡이는 덤불에 가려진 안평대군의 옛집 비해당, 볼품없는 다세대 주택에 불과한 시인 윤동주의 자취집, 재개발로 흉흉한 친일파 윤덕영의 벽수산장을 용케 찾아 소개했다. 역사는 정녕 알아보는 이에게만 보인다. 해방 후 미 군복을 입고 조선에 돌아온 유일한 여성이자 파란만장한 인생사의 주인공인 앨리스 현의 원적지는 몰랐다면 그냥 스쳐버리고 말았을 흔한 동네 치킨집이 되어있었다.

그 중에서도 내게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중인문화의 절정인 옥계시사의 배경인 송석원, 그리고 조선시대 서촌의 주인들이 형성한 문화였다. 양반문화에 대응해 자신감에 넘친 중인들은 인왕산 기슭에서 남산을 정면으로 내다보는 넓은 시야를 확보하고 시문학동인인 ‘송석원시사’를 결성했다. 해마다 봄가을이면 백일장을 열었는데 날이 저물어 시가 다 들어오면 소의 허리에 찰 정도였고, 스님이 그 시축들을 지고 당대 제일의 문장가를 찾아가 품평 받았다니... 그 풍류가 넘치는 정경이 골짜기 가득 벅차게 상상된다.

그들은 신분 때문에 벼슬길이 막혔다. 돈과 재주가 있었으나 세상에 쓰일 길이 없었다. 그중 한 명이었던 중인 출신의 문인 장혼이 쓴 <평생지>에는 여유로움과 동시에 헛헛함이 배어 있다. 불덩이를 삼킨 듯한 울화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에서 모욕당하느니 차라리 은일하여 자신만의 삶을 살길 바랐다. 욕망은 점차로 소박해져서 양반들이 목청 높여 말하는 맑고 깨끗한 청빈의 삶마저도 넘어섰다.

언젠가 명리학을 공부하는 어느 선생에게서, 가장 사주팔자가 좋은 사람은 바로 동네 쌀집 아저씨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쌀집 주인인데다 통장을 겸해 가게를 동네 사랑방으로 삼아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고, 환갑쯤 되었을 때 동네잔치를 벌이는데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자식들이 하나도 상하지 않고 모두 자라나 제 밥벌이를 하니, 잔칫날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술도 먹고 떡도 먹으며 축하를 하는...그런 삶.

어쩌면 평범이야말로 가장 구하기 힘든 비범인지라!

※ 지금까지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주부터 새로운 필진이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매주 목요일, 세상만사 풍경 속 각양각색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최경 작가의 ‘사람기억, 세상풍경’이 금요일로 요일을 옮겨 연재됩니다. 30일(목)부터 서울 구석구석 보석 같은 명소를 소개하는 칼럼이 연재될 예정이오니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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