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사랑] 고종과 당신의 공통점은 ‘OO을 좋아한다'

서울사랑

발행일 2017.11.17. 09:37

수정일 2017.11.17.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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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에게도 개방해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는 정관헌, 덕수궁 개방 시간과 같다 ⓒ서울사랑

일반인에게도 개방해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는 정관헌, 덕수궁 개방 시간과 같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5년 연간 커피 소비량은 1인당 428잔으로 매일 한 잔 이상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집계됐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커피를 즐겨 마시게 됐을까? 일제강점기 독립과 근대화를 위한 외교 수단으로 시작된 커피의 역사를 훑어본다.

조선 시대 말기 서양에 문호를 개방할 때부터 우리나라의 커피 역사가 시작된다. 1800년대 후반 조선에 온 각국의 외교관과 선교사들은 조선 왕실과 관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커피를 바쳤다. 외교와 선교의 한 방법으로 커피를 사용한 것이다. 당시에는 커피를 ‘양탕’(서양인이 준 탕국)이라고 불렀다.

한국인 최초로 커피에 대해 기록한 유길준은 서양 기행문 ‘서유견문’(1895년)에 “1890년쯤 커피와 홍차가 중국을 통해 조선에 소개됐다”, “서양 사람들은 주스와 커피를 조선 사람들이 숭늉과 냉수 마시듯 한다”고 썼다.

최초의 황실 카페, 정관헌

커피의 역사를 논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고종이다. 외교 사절을 접대하면서 간혹 커피를 마시던 고종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1년 동안 머물면서 커피를 애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불안하고 억울한 마음을 커피 향과 카페인으로 달랬던 것이 아닐까. 커피 애호가가 된 고종은 환궁 후에도 커피를 즐겨 마셨고, 궁중 다례 의식에까지 커피를 사용하도록 했다. 이를 입증하는 대표적인 곳이 정관헌. 정관헌은 1900년 고종이 다과를 들거나 외교사절단을 맞아 연회를 여는 등의 목적으로 덕수궁 안에 지은 회랑으로 늘 커피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정관헌은 서양풍 건축 양식에 팔작지붕을 얹은 독특한 건축물이었다. 바깥 기둥에는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을, 서양식 테라스에는 전통 문양을 넣었는데, ‘우리의 것을 지키며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고종의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커피 애호가 고종의 노림수

당시 고종의 가장 큰 관심사는 외교였다. 외교를 통해 대한제국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스스로 근대화를 이루겠다는 생각이었다. 정관헌에서 외국 사신들과 커피를 마신 것도,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참여한 것도 그런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밑작업이었다.

1900년에는 늘 곁에서 외국 사신의 접대 업무를 돕던 손탁 (러시아 공사 위베르의 처형. 4개 국어에 능한 사교계의 유명 인사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음)에게 정동의 땅과 한옥 한 채를 하사해 외교관을 맞는 공간으로 활용케 했다. 이것을 이후 손탁이 규모를 키워 손탁호텔로 개조하고 서양식 침실과 카페를 만들었다. 커피 전문가인 박영순 경민대 교수에 따르면 고종은 이 카페를 손님 맞는 장소로 활용했으며, 고종의 각별한 지원을 받아 해외 유학을 다녀온 민영환, 윤치호, 이상재, 이완용(후에 변절) 등 친미·친러 개화파가 주축이 된 정동파 인사들로 하여금 외교전을 펼치게 했다고 한다.

‘정동구락부’로 불리던 정동파는 손탁호텔에서 외교관들에게 커피를 대접하며 친분을 쌓고 국제사회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미국도 필리핀 지배를 목적으로 일본의 대한민국 지배를 인정하면서 정동구락부는 설 땅을 잃게 되었고 미국인, 러시아인이 물러난 손탁호텔은 일본인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고종의 ‘커피 외교’가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다.

이상이 살던 집터에 재현한 제비다방. 화~토요일까지 무료로 개방한다 ⓒ서울사랑

이상이 살던 집터에 재현한 제비다방. 화~토요일까지 무료로 개방한다

근대 문화·예술가들의 성지

목적이야 어찌 됐든 한 나라의 왕이 커피를 애호했으니 시중에 커피 문화가 확산된 건 당연지사. 1938년 6월에 발행한 잡지 ‘청색지(靑色紙)’에 실린 기사 ‘경성 다방 성쇠기’에 따르면 다방이 서울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23년 무렵이었다. 충무로3가에 개업했던 후다미가 1호. 주로 일본인 청년이나 사교계 인사들이 이용했다. 일본 유학파가 늘면서 다방은 점점 한국인 엘리트 계층의 문화·예술 공간으로 변했다.

한국인이 차린 최초의 다방은 1927년 이경손이 관훈동에 문을 연 카카듀. 이곳은 당시 예술인들의 아지트로 전람회, 문학 행사가 자주 열렸다. 이경손은 나운규를 발굴한 영화감독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잘 알려진 대로 시인 이상도 ‘제비다방’, ‘69다방’, ‘쓰루(鶴)다방’, ‘무기다방’ 등 여러 다방을 운영했다. 다방을 무척 사랑했으나 영업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던 관계로 모두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상이 운영한 다방은 문화·예술인의 사랑방이었다. 명동, 충무로, 종로 등지에 다방이 등장했지만 커피값이 너무 비싸 서민들은 엄두도 못 냈고, 고위 관료나 신식 멋쟁이들이 단골손님이었다. 한국 최초의 오페라 가수 윤심덕은 종로 다방에서 커피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커피와 다방 문화는 쇠퇴기를 맞는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커피, 설탕 등의 수입이 원활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인스턴트커피가 유입되면서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고, 검은 빛깔의 커피액이 회충약으로도 효과가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약 대접을 받기도 했다. 그 때문에 1957년경 명동에만 무려 50개 이상의 다방이 성행했다고 한다.

문화·예술인이 대부분이던 일제강점기와 달리 미국의 원조 물자와 관련한 브로커, 문화·예술인, 대학생 등 다방을 찾는 손님도 다양해졌다. 한국전쟁 후 명동 일대에 들어선 다방 ‘마돈나’, ‘플라워’, ‘동방싸롱’, ‘모나리자’ 등은 절망에 빠진 예술가들의 정신적 안식처가 되었다.

한국 현대사의 숨결이 배어 있는 학림다방. 청춘을 학림과 함께했던 문화·예술인, 대학생은 물론 복고 문화를 즐기려는 젊은 층도 많이 찾는다. ⓒ서울사랑

한국 현대사의 숨결이 배어 있는 학림다방. 청춘을 학림과 함께했던 문화·예술인, 대학생은 물론 복고 문화를 즐기려는 젊은 층도 많이 찾는다.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의 산실

명동의 다방이 문화·예술인의 아지트였다면 동숭동과 신촌에 생긴 다방은 대학생들의 아지트였다. 시초는 1956년 동승동에 문을 연 학림다방.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과 교수, 그리고 이청준, 전혜린, 김지하, 황석영, 김민기 등 예술계 인사들이 드나들던 이곳은 ‘제 25 강의실’로 불리던 지성의 공간이자 민주화 운동이 산실이었다.

1960년엔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에 맞서 4·19 혁명의 불꽃을 피웠고, 1980년 5·16 쿠데타 격동기엔 학림사건이 터지면서 민주화 운동의 메카 노릇도 했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학림다방은 60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며 역사 속의 고고한 공간으로 남아 있다. 1971년 신촌에 문을 연 독수리다방도 대학생들이 문학적 감상과 시대적 고민을 나누는 토론의 공간이었다. 한때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지만 2013년 다시 문을 열어 성업 중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추억의 거리`에 있는 옛날 다방. 예전엔 다방이 약속 장소였기에 `약속다방`이라는 상호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옛 장식 그대로 재현해놓아 추억 여행을 하기 좋다 ⓒ서울사랑

국립민속박물관 `추억의 거리`에 있는 옛날 다방. 예전엔 다방이 약속 장소였기에 `약속다방`이라는 상호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옛 장식 그대로 재현해놓아 추억 여행을 하기 좋다

커피 한 잔, 기다림의 미학

한편으로 다방은 낭만의 대명사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팝송을 들으려고 다방을 찾는 젊은이도 적지 않았다. 그 여세에 힘입어 명동의 쎄시봉 등 음악 다방이 성행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방에서 만남을 가졌으며,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약속 시간이 지났어도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그대 오기를 기다려봐도 웬일인지 오지를 않네, 내 속을 태우는구려.”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이 다방의 전축 위에서 계속 돌아갔다.

1975년에 문을 연 신촌의 미네르바는 우리나라 최초로 사이펀 커피를 선보인 곳이기도 하다. 사이펀 커피는 알코올램프로 끓여 생긴 수증기가 올라가서 원두를 적시고 다시 내려오는 방식으로 추출하는 커피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이국적인 커피 맛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하지만 경영난으로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고, 18년 전 현인선 씨가 인수해 현재까지 성업 중이다. 현인선 씨는 다양한 커피 맛을 제공하기 위해 사이펀 커피뿐 아니라 핸드 드립, 에스프레소, 더치 등 손님이 원하는 방식의 커피를 내놓고 있다. 미네르바도 학림다방과 함께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사이펀 커피가 마니아층을 위한 커피였다면 비엔나커피는 서양식 소비주의의 상징이었다. 진한 커피에 생크림과 설탕을 듬뿍 넣은 달달한 커피. 일반 커피보다 3배나 비싼 100원이었지만 그 시절 멋쟁이들에게는 핫 아이템이었다.

요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는 만화 카페. 단순히 커피만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책도 보고 강의도 듣고 취미 활동도 할 수 있는 다양한 카페가 생겨나고 있다 ⓒ서울사랑

요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는 만화 카페. 단순히 커피만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책도 보고 강의도 듣고 취미 활동도 할 수 있는 다양한 카페가 생겨나고 있다

대한민국은 커피 공화국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커피 문화도 바뀌었다. 바리스타가 인기 직종으로 떠올랐으며, 핸드 드립, 더치커피 등 다양한 추출 방식의 커피가 유행을 선도하고 있다. 여기에 커피 애호가들은 생두의 생산 가공 방식까지 주목한다. 공정무역 커피다. 공정무역 커피는 다국적기업이나 중간 상인을 거치지 않고 제3세계 커피 농가에 합리적인 가격을 직접 지불하고 사들이는 커피를 말한다. 서울시청 시민청의 지구마을 카페에서도 공정무역 커피를 마실 수 있다.

그사이 카페 문화도 바뀌어 단순히 커피나 차를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책도 보고 인문학 강의도 듣고, 취미 활동도 하고 때론 잠도 잘 수 있는 다양한 기능을 겸비한 카페가 속속 생겨나고 있다.

2017년 5월 기준, 서울 시내 커피 전문점만 1만7,000개. 눈을 뜨면 생기는 것이 커피 전문점이라고 할 정도로 대한민국은 커피 공화국이 되었다. 한 나라 황제의 기호품으로, 독립을 위한 외교 수단으로 사용한 지 100년 만의 일이다. 비록 다방은 화석화되었지만 커피는 예나 지금이나 모던의 상징이다. 머그잔에 커피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이 커피 한 잔에 100년의 이야기가 담겨 있을 줄이야. 지난 100년의 이야기는 그리 향기롭지 못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부디 향기로운 이야기만 담기길 바란다.

글 이정은 사진 홍하얀
출처 서울사랑 (☞ 원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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